[권력이동](1)청와대…민심 등돌려 '처참'절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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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대선이 끝난 지 한달. 한국사회는 역사상 최초의 합법적 여야 정권교체라는 실험을 하고 있다.

실험의 또다른 이름은 '권력이동' .정권이 바뀌면 권력이 옮겨 가는 것은 당연하지만 여야의 교체인 만큼 오늘날 벌어지는 권력이동 현상은 본질과 규모.양상이 과거완 판이하다.

국가 모든 부문이 소용돌이치고 있다.

청와대.안기부.군.검찰.경찰 등 구 (舊) 여권체제를 형성했던 집단을 중심으로 권력이동의 모습을 들여다본다.

“웬 코가 그렇게 크냐.” 얼마전 삼청동에 자리한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정무분과위원회. 청와대 업무 인계를 위해 출두했던 조홍래 (趙洪來) 정무수석은 못들은 척 꾹 참았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일그러졌고, 벌개졌다.

C위원의 “그런 코는 난생 처음이다” 는 등 희롱이 계속되자 김정길 (金正吉) 분과위원장이 황급히 제지에 나섰다.

낯빛이 달라진 趙수석을 향해 2탄이 날아들었다.

“똑바로 한게 뭐 있느냐. 당신들 때문에 나라가 요모양 요꼴이 됐다.”

김영삼 (金泳三) 정권으로부터 사법처리를 당한 적이 있는 L위원의 호통이었다.

다음날 이영래 (李永來) 행정수석도 된통 혼나기는 마찬가지였다.

위원들은 “총리실 보고와 다른 게 없다.

행정수석실은 없어져도 무방하겠다” 고 불호령을 내렸다.

한때 최고의 권부로, 최고 권력층의 일원으로 잘나가던 청와대 수석들의 현 주소는 이렇다.

경제를 거덜낸 죄로 찍소리 못하게 된 것이다.

'국사범 (國事犯)' 취급을 받다 보니 趙수석처럼 '큰코 다치는' 사태까지 벌어진다.

이네들을 더욱 초라하게 만드는 것은 벌벌 떨던 정부기관조차 자신들을 우습게 보는 것이다.

행정부에 자료라도 요청하면 '웬 되먹지 않은 짓이냐' 는 식이다.

한 행정관은 굳이 챙길 것도 별로 없지만 꼭 필요한 자료는 아예 친정부처 타부서에 있는 고시동기생에게 부탁한다고 털어놨다.

김영삼 대통령에 대한 정보 보고도 부실해졌다.

김대중 당선자가 대통령보다 먼저 보고받는 경우를 탓하는 것은 실없는 짓이다.

다른 기관 정보들도 다를 게 없다.

검찰은 한보사건과 관련해 유죄판결을 받은 홍인길 (洪仁吉) 전 총무수석과 권노갑 (權魯甲) 전 의원에 대한 형집행정지 결정여부도 청와대보다 당선자측에 먼저 의향을 묻고 그쪽 뜻대로 처리했다고 한 청와대 관계자는 술회했다.

청와대에서도 金대통령을 '기피하는' 현상이 나타나지만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조차 없다.

얼마전엔 1급비서관중 퇴임후의 金대통령을 보좌할 사람이 나타나지 않아 金대통령이 직접 지명한 일도 있었다.

지난 88년과 93년에도 정권인수팀에 있었고 새로이 진주 (進駐) 하는 세력을 맞아 봤지만 '코 사건' 은 물론 요즘 이어지는 일련의 험악한 꼴은 겪지 않았다.

며칠전 청와대의 한 수석비서관은 A은행의 전화를 받았다.

“마이너스 통장 결제일은 16일입니다.

내야할 돈은 3백40만원이고요. 앞으로 이 통장은 안쓰는 걸로 알겠습니다.”

자신을 대리라고 소개한 상대방은 속사포 쏘듯 이렇게 통고하고 전화를 끊었다.

'마이너스 통장' 은 잔고가 한푼 없어도 월 2천만원까지는 카드로 쓸 수 있게 한 것. 그것도 그가 청와대 수석에 임명되자 은행측에서 '신용 확실한 고객용 상품' 이라고 권유해 만든 것이다.

뭐라고 한마디 할 겨를도 없이 통보를 듣고난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 '당신은 다 끝난 사람이니 이젠 거래못한다' 는 전화 아니냐. 물러날 날은 아직도 한달이상 남았는데 세상 인심은 무섭다.”

92년 선거때 노태우 (盧泰愚) 대통령이 탈당해 중립을 선언했지만 청와대 관계자 상당수가 김영삼후보를 직간접으로 지원했다.

때문에 청와대 일각에선 공신 대열에 끼워줄 것으로 은근히 기대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한켠에선 새 집권세력이 된 민주계와 줄을 대기 위해 열심히 뛰는 등 그런대로 미온 (微溫) 을 느낄 수도 있었다.

88년의 청와대는 당당했다.

청와대가 노태우후보에게 자금과 정보를 대준 실질적인 선거사령탑 역할을 했기때문에 정권 인수팀이 청와대의 눈치를 보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여당에서 야당으로 권력이 넘어가는 첫 경험이다.

경제파탄죄 때문에 대부분 청와대 수석들은 식사 예약도 '청와대 ' 이름으로 하지 않는다.

개인 아무개일 뿐이다.

청와대에 있다고 하면 냉소적으로 변하는 주변의 시선이 요즘들어 더욱 싸늘해지기 때문이다.

당선자쪽과 이런 저런 연 (緣) 이 있어 인수위에 들어간 몇몇에게는 선망의 눈길도 보내진다.

남아있는 파견직원들은 때론 본관쪽을 흘겨보기도 하고 이미 적당한 자리를 찾아 떠난 민주계 출신들을 원망하기도 하는 게 고작이다.

옛날처럼 승진해서 친정 (파견부처)에 돌아가는 것은 고사하고 과연 돌아갈 자리나 있는지를 걱정해야 하는 직원들은 자신들을 '범죄시' 하는 세간의 눈총에 주눅이 들어 있다.

이상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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