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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조선을 찾은 헬렌 켈러 온몸으로 ‘장애극복’ 외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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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지난 20일은 장애인의 날이었다. 20세기를 살다간 장애인 가운데 인간승리의 주인공을 든다면 아무래도 헬렌 켈러(1880~1968)가 첫손가락에 꼽히지 않을까? 볼 수도, 들을 수도, 말할 수도 없는 삼중고의 장애인인 헬렌이 1937년 식민지 조선을 방문했다. 57세의 헬렌은 7월 13일 부민관(지금의 서울시의회 자리)에서 강연을 했다.

류달영(후에 서울대 농대 교수)은 당시 개성 호수돈여고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헬렌의 강연을 들으려고 애썼지만 허사였다. 다행히 헬렌이 타고 가는 평양행 급행열차가 7월 15일 오후 4시40분에 개성역에서 1분간 정차할 때 객차 뒤쪽 전망대에 나와 강연할 예정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담임반 학생 50명을 이끌고 개성역에서 기다렸다. 열차가 기적을 울리고 플랫폼으로 들어오는데 벌써 열차의 맨 뒤쪽에는 헬렌이 비서 폴리 톰슨과 일본의 유명한 맹인 철학교수 이와바시(岩橘武夫)와 함께 난간을 짚고 서 있었다. 열차가 서자마자 헬렌은 강연을 시작했다. 사진 왼쪽부터 이와바시, 헬렌 켈러, 폴리 톰슨이다(사진=류달영 『소중한 만남』, 솔).

폴리는 손가락을 벌려 헬렌의 입술과 목에 대고 입술의 움직임과 목의 진동을 파악해 명확하지 않은 그녀의 말을 정확한 영어로 옮겼다. 그리고 다른 한 손을 헬렌의 손바닥에 대고 마치 손가락으로 무선전신을 치듯이 두들겨서 주위의 상황을 상세히 알려 주었다. 그 다음에는 이와바시 교수가 역에 모인 사람들에게 일본어로 통역해 주었다. 구경 나온 사람들에게는 진기한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역장과 차장도 구경하느라 넋이 나가 열차가 예정을 넘겨 5분 동안이나 정차하게 되었다. 이날 헬렌은 ‘이 세상을 향상시키는 것은 오직 사랑뿐이며, 사랑이 없는 국가와 사회는 퇴보할 뿐’이라는 요지의 강연을 했다.

헬렌 켈러의 후반 생애는 열정적이었다. 한창때는 장애인을 돕는 일에 하루 18시간씩 바칠 정도였다. 그녀는 사형 제도를 반대하고 인종주의를 거부했으며, 교통수단이 지금과 비교할 수 없으리만큼 열악하던 그 시절 지구를 아홉 바퀴나 돌며 39개국을 방문했다. 유럽·아시아·호주·아프리카까지 그야말로 전 세계를 누비며 활약했고, 1937년에는 식민지 한국 땅에까지 발걸음을 옮겼다. 우리는 삼중고의 헬렌이 전해준 메시지를 얼마나 실천하고 있는 것일까? 장애인과 약자를 배려할 줄 아는 따뜻한 사회가 그립다.

박상익(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