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이공계] 1. 위기의 이공계 현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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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AIST의 한 교수가 화학실험실에서 학생과 실험 기자재 사용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있다.

고급 과학기술 두뇌의 산실인 한국과학기술원(KAIST)조차 '이공계 위기감'에 휩싸여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설문에 응한 교수의 90.7%와 학생의 93.5%가 '지금 이공계는 위기'라는 데 동의했다. 중앙일보와 KAIST의 공동 조사에서 드러난 결과다. 이번 공동조사는 KAIST를 통해 ▶이공계의 현주소를 점검하고▶이공계 문제의 원인과 해법을 찾아보려는 취지에서 실시됐다.

◇부실한 이공계 교육=교수의 61.3%, 학생의 69.5%가 현재 우리나라 이공계 교육이 부실하다고 봤다. 교수들의 경우 근무연수가 많을수록 이공계 교육이 부실하다고 응답했다. 근무경력 5년 이내 교수들의 경우 그 비율이 50%였지만 25년 이상 된 교수들은 80%나 됐다. 이는 교수직을 오래한 사람일수록 우리나라 이공계 교육의 펀더멘털(기본)이 과거와 달리 점차 취약해지고 있다는 인식을 하고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교육여건에 대한 교수.학생의 만족도도 70%에 그친다. 전공에 따라서는 실험기자재가 미비해 불편을 겪을 정도다. 화학과의 경우 질량분석기 등 10년 이상 된 실험기자재를 교체할 예산이 부족해 학생들이 외부에서 기자재를 빌려 실험하기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올해 장비 교체비로 책정한 예산은 6억4500만원에 불과하다. 1999년 이후 한번도 증액되지 않고 매년 똑같다. 이는 예산이 매년 2000억원 안팎에 머물러 있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 세계적인 대학으로 키우기 위해서는 교육여건 개선이 시급하다는 지적은 그래서 나온다.

우리나라 대학 가운데 여건이 가장 좋다는 KAIST가 이 정도인데 다른 이공계 대학은 두말할 것도 없다는 게 학교 측의 설명이다.

이렇다 보니 대학 밖에서부터 이공계 인력의 질 하락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에 따르면 기업들은 이공계 인력 충원 때 가장 큰 애로사항으로 '인력의 질적 부족'을 꼽는다고 한다. 이로 인해 해외에서 고급 기술 인력을 유치하는 기업도 적지 않다고 전경련은 밝혔다.

이번 설문조사 결과 분석작업에 참여한 현대경제연구원 유병규 경제본부장은 "대학을 졸업한 학생도 재교육하지 않으면 기업 현장에 바로 투입할 수 없을 정도로 현재 우리나라 이공계 교육환경은 문제가 많다"고 지적했다.

◇'이공계 푸대접' 인식 확산=2002년 KAIST에 입학했다가 지난해 3월 의과대학으로 진로를 바꾼 이모(21)씨는 "선배들에게서 공대 출신은 졸업한 뒤 정당한 대우를 받기가 어렵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이공계 학생으로서 흔들리지 않고 4년 동안 공부하기 힘들 것 같아 일찌감치 포기했다"고 말했다.

화학과의 한 교수는 "KAIST 교수의 보수만 봐도 70년대까지는 자긍심을 느낄 정도로 일반 대학의 두세 배에 달했다"며 "이후 정부.기업의 전폭적 지원이 사라지면서 이제는 위기론까지 거론되는 실정"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이 대학 학생의 89.5%, 교수의 87.3%가 '이공계 출신들이 사회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고 응답했다. 한편 교수의 절반 이상(53.2%)은 이공계 인력이 실제 필요한 인원보다 많이 양성되고 있다는 수급 불균형론에 동의했다.

박오옥 기획처장은 "우리나라 이공계의 수급 불균형은 사회는 첨단시대로 급속히 변하는데 대학은 바뀌지 않은 데서 파생된 결과"라며 "분야별로 배출 인력을 조절해야 할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불신받는 이공계 정책=이번 설문에서 교수.학생 10명 중 9명이 정부의 이공계 정책에 불만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공계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 정부 인식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경종민 교수는 "우리의 과학기술정책은 '화전민'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라며 "장기적인 정책을 펴기보다는 장관이나 기관장이 바뀔 때마다 가시적인 성과를 내기 위해 단기 사업에 매달리는 추세"라고 말했다.

이공계 위기가 국가경쟁력 저하로 이어질 것이란 우려도 많았다. 대부분의 교수(93.1%)와 학생(87.8%)이 이공계 위기로 앞으로 중국.인도 등 경쟁국에 뒤질 것이라고 응답했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이공계 출신의 경제.사회적 만족도를 높이는 정책이 마련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컸다. 교수 63.2%, 학생 70.8%가 이같이 주장했다. 이어 ▶공직 진출 확대▶장학금 및 병역특례제도 확대▶재정 지원 확대▶이공계 대학 정원 감축 등의 요구가 나왔다.

장순흥 KAIST 교무처장은 "정부 조직에서 상위직으로 올라갈수록 행정직이 강하고 기술직이 약한 구조를 시급히 개선해야 한다"며 "이공계 공직 진출 확대와 주요 국가 의사결정 참여 확대로 21세기 과학기반을 확충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김시래(팀장), 염태정.심재우.강병철(이상 산업부), 김남중.강홍준.하현옥(이상 정책기획부), 김방현(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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