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벌정책 진로와 과제]1.신정부 재벌정책과 한국재벌의 구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공식 용어로는 '대규모 기업집단' 을 가리키는 재벌은 한국경제에서 각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

아마도 재벌처럼 명암 (明暗) 과 애증 (愛憎) 을 함께 지니고 있는 경제단위도 없을 것이다.

국제통화기금 (IMF) 체제 아래 경제여건이 뿌리째 바뀌고 정권이 교체되는 과정에서 재벌이 다시 수술대에 올랐다.

이번 수술은 폭이나 강도면에서 과거와는 사뭇 다를 전망이다.

김대중 (金大中) 당선자 진영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재벌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재벌 개혁은 이 시대에서 반드시 필요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재벌은 현실적으로 중요한 고용.투자 주체란 점에서 재벌정책이 '개혁' 이 아닌 '징벌 (懲罰)' 로 흐르는 듯한 분위기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이 시점에서 재벌의 문제는 무엇이며, 어떻게 바로잡아야 할 것인지를 5회에 걸쳐 집중 분석한다.

한국 재벌은 한때 선진국 기업들의 연구대상이 되기도 했다.

계열사들의 일사불란한 행동 통일, 신속한 의사결정, 강력한 추진력 등으로 숱한 '기적' 을 이뤄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 경제 규모가 커지고 고도성장세가 멈칫하면서 효율성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특히 계열사간에 얽히고 설킨 출자.보증 고리는 계열사 한 두개의 도산이 그룹 전체로 확산되는 문제를 노출시켰다.

규모의 확대로 오너 한사람의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게 된 상황변화 속에서도 오너의 영향력은 줄지 않았다.

지난해말 자금지원 조건을 협상하기 위해 방한 (訪韓) 한 IMF실사단은 한국 재벌의 재무구조를 보고 놀라움을 표시했다.

30대 그룹의 빚이 자기자본의 4배에 달하고 오너와 친인척.계열사의 내부지분율이 평균 43%에 이른다는 것은 그들로선 상상 밖이었다.

IMF는 이런 상황인식 속에서 긴급 자금지원의 조건중 하나로 기업경영의 투명성 확보를 요구하고 나섰다.

IMF의 이같은 요구는 김대중 대통령당선자와 인수위 등의 재벌 관련 발언이 잇따라 나오며 이른바 '재벌해체론' 으로 비화되기 시작했다.

재벌 내부에서도 IMF가 제시한 방향에 대해서는 토를 달고 있지 않다.

한국 경제의 규모가 커지고 기업들이 전방위적인 경쟁을 펼치고 있는 마당에 기업 경영이나 회계도 국제적 원칙에 맞춰야 한다는 점에는 이론이 없다.

그러나 방향이 바람직하다 해도 시기.방법을 생각지 않을 수는 없다.

재계가 우려하는 점도 바로 이 부분이다.

'재벌 개혁' 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이것이 '재벌 혼내주기' 로 변질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냉정히 따져보면 결합재무제표와 상호지급보증 해소 문제는 IMF의 요구보다 한발 앞서 나가고 있는 게 사실이다.

IMF 의향서와 이면합의서의 내용에는 결합재무제표를 작성해야 하고 상호지급보증 관행을 없애가야 한다는 원칙적인 언급만 있지 이를 언제까지 해결하라는 시한은 없다.

빚보증을 없애라는 말은 쉽지만 64조여원에 이르는 빚보증을 1~2년 안에 해소하기란 현실적으로 어렵게 돼 있다.

계열사를 팔라고 하지만 30대 그룹이 모두 계열사를 내놓는다면 사갈 기업도 없다.

결합재무제표 역시 계열사간에 서로 다른 회계기준이나 해외 지사의 문제 등 기술적인 어려움 때문에라도 당장 도입하기 어려운 측면이 많다.

대량실업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경제위기를 초래한 가장 큰 당사자중 하나인 기업, 그 중에서도 재벌이 '고통분담' 을 회피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하지만 여론을 의식한 '혼내주기' 식 접근은 오히려 재벌 개혁에 걸림돌이 된다는 지적도 있다 (한국개발연구원 유승민 박사) . 지나친 빚 경영이 문제라면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을 함께 열어주는 대책이 나와야 문제가 풀릴텐데 무조건 다그치기만 할 경우 결국 '현실' 이란 벽에 부닥쳐 개혁이 다시 좌초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한국경제연구원 좌승희 원장) . 재벌이 한국 경제의 성장과정을 반영한 시대적 산물이라면 새로운 시대에 적응키 위한 수술도 한국 경제 전체의 구조조정이란 관점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정경민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