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무역수지 내용 들여다보면]원화 절하폭 비해 수출 안늘어 불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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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지표만 보면 어려운 시기에 그래도 수출이 효자노릇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통관기준 지난해 12월 무역수지가 2개월 연속 흑자를 나타내는 동시에 월중 사상최대 흑자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꺼풀 벗겨 속내용을 들여다보면 아직 안심하기엔 이른 징후들이 드러난다.

무엇보다 수출의 건실한 증가보다 수입의 비정상적인 감소가 흑자의 주요인이란 것이 문제다.

12월 수입 감소율은 오일쇼크 때인 75년 7월 이후 최대다.

또 지난 한해의 수입감소율 ( - 7.2%) 도 82년 이후 최대치다.

1분기만 해도 증가세였던 수입이 3분기부터 본격적인 감소세를 보인 것은 우선 경기부진 때문이다.

내수가 위축되고 대기업 부도가 줄을 이으면서 설비투자가 내리막길을 걸었다.

지난해 자본재 수입은 9.1% 줄었다.

소비재 수입 감소율 (6.6%) 보다 훨씬 컸다.

특히 4분기 자본재 수입은 19.4%나 감소했다.

투자가 이렇게 줄어서는 앞으로 수출이 건실하게 늘어날 수 없다.

최근의 대폭적인 수입 감소세는 은행의 무역금융시스템 마비도 한몫 한 것으로 보인다.

요즘은 필수적인 수출용 원자재 수입마저 어려운 실정이다.

원자재 수입이 막히면 산업활동이나 수출쪽에는 한달 후쯤 악영향이 가시화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우리나라는 1백원을 수출하려면 30원 정도의 원자재.자본재를 수입해야 하는 구조를 갖고 있다.

게다가 통산부 관계자는 "정확히 파악되지는 않지만 엄청난 물량의 수입신용장이 개설 대기중이며 금융시스템이 정상화되고 환율이 안정되면 쏟아져 나올 것" 이라고 밝혔다.

즉 지난 연말의 비정상적인 수출입 상황이 경우에 따라 연초 수출부진.수입증가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로 연결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수출을 보면 원화절하폭에 비해 나타난 효과가 미흡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통산부 분석에 따르면 환율이 10% 오르면 수출은 5.6% 늘어나고 수입은 1.5% 감소하는 효과가 있다.

하지만 연초에 비해 환율이 2배 가까이 뛰었음에도 불구하고 연간 수출증가율은 5.3%에 그쳤다.

특히 환율급등이 두드러졌던 12월의 수출증가율이 고작 2.8%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기업부도와 금융경색 등의 요인으로 수출증대의 호기를 살리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지난해 중반쯤에는 잘 되던 자동차수출이 기아사태 이후 마이너스로 돌아선 것이 좋은 예다.

올해는 세계경기가 지난해보다 둔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우리의 주력 수출선인 동남아.중국 등도 경제불안으로 예전같지가 않다.

금융.외환시장은 언제 정상화될지 아직 전망이 불투명하다.

기업구조조정 바람이 거세게 일면 일시적으로 수출에 나쁜 영향도 예상된다.

물론 환율 상승과 소비절약 추세로 전체 수입이 줄긴 할 것이다.

그러나 수출을 늘려 흑자기조를 정착시키기에는 풀어야 할 과제가 많다.

'수출만이 살길' 이라면 여기에 국가적 역량을 모으는 자세가 절실하다.

이재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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