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최고 지도자 해부] 시진핑④끝. 그는 과연 천하를 손에 넣을 것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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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8년 3월 전인대 기간에 신임 국가부주석에 취임한 시진핑이 국가부주석 자리에서 물러나는 쩡칭훙과 포옹하고 있다.

◇천량위(陳良宇) 오직사건으로 동요하는 상하이로 발령받다
2006년 8월 제17차 당대회를 앞두고 후진타오는 원자바오, 쩡칭훙(曾慶紅), 우관정(吳官正)과 함께 ‘상하이 그룹’의 천량위(陳良宇) 상하이시 당서기를 비판하고, 사회보험기금 부정 대출 혐의로 중앙기율검사위원회가 그를 입건 수사했다.
상하이의 정치•경제 및 사회 질서를 안정시키기 위해 후진타오를 비롯한 중국공산당 중앙은 상하이 후임 지도자 인사에 신중에 신중을 거듭했다. 우선은 상하이시장 한정(韓正)을 시위 서기 대행으로 겸임시켰다.
한정이 당서기 대리를 담당하는 사이 공산당 수뇌부의 각 정치 파벌은 자신의 이익을 대표할 인물을 ‘동방의 진주’로 불리는 상하이 지도자로 내세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암투를 펼쳤다. 공산당 최고지도부는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뒤 시진핑을 상하이 당서기에 임명했다.
최종 낙점에 앞서 류옌둥(劉延東), 리위안차오(李源朝), 보시라이(薄熙來), 리커창(李克强), 시진핑 등의 이름이 상하이시 당서기 후보로 거론됐다. 2006년9월30일 보시라이 부인 꾸카이라이(谷開來)가 움직였다. 해외 한 블로그 사이트가 “상하이시위서기로 보시라이가 적임이다”라며 다음과 같은 코멘트를 흘렸다. “보시라이는 상하이의 축소판인 다롄(大連)시를 다스린 경험이 있으며, 국제적으로 상하이 대(大)정부라 할 수 있는 상무부장을 역임했다. 상하이시위서기로 최적의 경력을 갖고 있다”, “류옌둥은 상하이 경제에 적응할 수 없으며, 시진핑도 큰 기백이 부족하다. 리위안차오는 상하이에 어울리는 화려함이 부족하고, 리커창도 틀에 박힌 관료기질 때문에 상하이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시진핑이 지목된 것일까?
첫째, 시진핑은 ‘태자당’이지만 ‘태자당’의 ‘도련님’스러운 화려함이 없다. 파벌 색채도 엹다. 따라서각 파벌이 그를 받아들이기도 쉬웠다.
둘째, 천량위 사건을 주도한 후진타오와 쩡칭훙은 모두 중앙집권통치의 유지에 중점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쩌민과 후진타오 시대에 시장 경제가 발전하고 중앙권력의 일부를 하부로 이행함에 따라 지방의 제후 세력이 확대됐다. 그 가운데 베이징의 천시둥(陳希東)이 장쩌민에 도전했고, 이어 천량위가 후진타오와 원자바오에 반대 의견을 내세웠다. 따라서 공청단 출신 후진타오와 ‘태자당’ 출신 쩡칭훙 두 사람의 이익과 시각이 공산당에 의한 통치와 중앙의 권위를 우선한다는 점에서 일치한 것이다.
천성이 바른 시진핑이 상하이시위서기에 임명된 것은 시진핑의 중앙에 대한 복종과 이상의 역사적 추세를 옹호하려는 그의 자세를 후진타오와 쩡칭훙이 신뢰했음을 보여준다.
2007년3월24일 오후, 허궈창(賀國强) 전중앙조직부장이 상하이 당•정 간부들에게 시진핑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정치적으로 강고하고, 사상과 정책 수준이 높으며, 당무와 경제활동을 숙지하고, 거시 정책의 결정 능력도 강하다. 지도경험이 풍부하고 조직 지도와 통솔 능력이 우수하다”라고.

◇‘천량위 일파 비판’, ‘충성을 선서하면 임관’하는 조치를 취함
시진핑은 2007년3월23일 상하이에서 활동을 개시했다. 그 때부터 2007년10월27일까지 도합 7개월 4일 동안 상하이에서 근무했다. 시진핑이 상하이에서 수행한 업적은 시진핑 자신의 말, 즉 그의 이임연설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나는) 중점적으로 다음 네 가지 면에 중점을 두고 활동했다. 첫째, 중국공산당 제9회 상하이시 대표대회를 개최하여 지도그룹을 선출했다. 목표를 명확히 하고 힘을 응집해 사람들의 마음을 안정시켰다. 둘째, 경제·사회가 보다 뛰어나고, 보다 빠르게 발전하게끔 온 힘을 다했다. 셋째, 민생문제 해결을 특히 중시했다. 넷째, 당 건설을 착실하게 강화했다. 그밖에 장애인올림픽 개최와 여자월드컵 축구에도 힘을 쏟았다”
이 가운데 중점은 바로 첫째 항목에 있었다. 즉, 지도 그룹을 선출함으로 목표를 명확히 하고 힘을 응집했으며 사람들의 마음을 안정시켰다.
주지하는 대로 천량위 사건은 표면적으로는 상하이 사회보험기금의 위법 조작과 수뢰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상하이 그룹’이라는 이익집단을 손 본 것이다. 당시 후진타오•원자바오 지도체제와 거시경제조정정책에 대해 상하이 그룹이 반항했다. 그 가운데 천량위가 선봉에 황쥐(黃菊)가 부대장에 장쩌민이 막후 대장으로 존재했다. 천량위를 타도한 것은 ‘상하이 그룹’ 전체 이익집단에 관련이 있다. 이 ‘돈으로 안되는 것이 없는’ 시대에 만약 천량위를 돌파구로 해 관련된 인사들을 더듬어 가면, 아마 다 체포할 수 없을 정도의 오직범(汚職犯)이 나왔겠지만 그로 인해 중국 정국도 대동란에 빠질 것이다. 이는 후진타오가 보고 싶은 것이 아니었으며 또 바란 바도 아니었다. 후진타오, 원자바오, 쩡칭훙은 감히 중앙과 대결하려는 소두목 천량위만을 겨냥했고, 대국적으로 ‘조화사회’라는 새로운 질서를 재구축하려 했던 것이다.
시진핑은 후진타오를 우두머리로 하는 중앙 수뇌부의 의도를 누구보다 깊이 이해했다. 중국 공산당 상하이시위의 지도그룹을 재선할 때 이미 정치적 생명이 끝난 천량위 패거리만 제외하고 나머지는 태도를 바꾸면 ‘관직을 수여’하고, ‘관직을 유지’해 주는 ‘두루뭉실하게 수습하는(和稀泥)’ 책략을 취했다. 불안해하는 상하이 고위 간부들을 안심시킨 것이다.
2007년5월23일 중공상하이시 제9회대표대회가 개최됐다. 시위서기에 임명된 시진핑이 회의를 주재했다.
5월28일 대회에서 새롭게 상하이시위원회를 선출했다. 이전 위원회 정원은 56명 뿐이었지만, 새로운 위원회 정원은 83인으로 늘었다. 게다가 주의 깊은 상하이 시민이라면 새로운 상하이 시위원회 멤버의 특징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전에는 상하이시 관할의 많은 구·현 당과 정부의 1인자들이 상하이시위원회위원에 선출되지 않았던 것에 반해, 이번에는 상하이시 관할의 19개 구·현의 최고위직 2명이 동시에 위원에 선출된 것이다.
이같이 ‘천량위만 비판하고, 나머지는 비호’, ‘충성을 맹세하면 임관’한다는 시진핑의 정책에 대해 시류에 민감하고 정치 풍향을 잘 파악하는 상하이 관료들은 어떤 불평도 하지 않고 임명을 받았고, 상층부에 순순히 복종했다.
선거가 끝나고 새로운 이익집단이 구성된 당일, 시진핑은 안팎의 언론에 다음과 같이 표명했다.
“우리는 후진타오 동지를 총서기로 하는 당중앙과 고도의 일치를 유지하며, 중앙의 권위를 자각적으로 지키며, 중앙의 정책이 상하이에서 순조롭게 시행될 수 있도록 확실히 보장한다.”
시진핑은 상하이에서의 7개월 4일 동안 매우 주의 깊고 신중했다. 공적인 장소에서는 말을 삼갔다. 중앙문서를 전달할 때에는 문서를 한 글자도 고치지 않고 낭독했다. 발언하지 않으면 안되는 경우에는 관료적인 말로 일관했다. 그의 언행에는 풍채가 없고 특징도 없고 강직함도 없었지만 지나침도 없었다.
중국에는 최근 ‘관료 기본 소양(官場基本功)’이라는 제목의 새로운 민요가 유행하고 있다. “처리 할 것은 안정이 우선이며, 정리하는 것은 기량이 있어야 하고, 일이 없는 것은 곧 재능이 있는 것이며, 타협할 것은 조화롭게 처리 한다”는 내용이다. 시진핑의 ‘관료 기본 소양’은 확실히 우수하다. 푸젠성 링더현에서 거뒀던 부정퇴치 업적은 단지 과거의 일로 잊혀졌다.
상하이시 간부들은 안심했다. 상하이 간부들의 실무능력은 중국 최고 수준이다. 경제발전의 촉진, 민생 촉진, 장애인 올림픽 개최, 여자 축구월드컵 등은 문제도 아니었다.
시진핑이 상하이에서 보여준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제어하고’, ‘무위의 정치’라는 집정방침에 후진타오가 만족했음은 분명하다. 2007년10월1일 즉 제17차 당대회가 개최되기 전날 후진타오는 특별히 상하이를 직접 시찰했다. 시진핑과 한정 등의 안내를 받아 상하이시를 시찰하고 참관했다. 그는 두 사람의 활동 보고를 듣고 평가했다. 동시에 후진타오는 단독으로 시진핑을 만났다. 제17차 당대회에서 그를 중국공산당 제5세대 지도자로 임명하겠다는 중앙의 결정을 전했다.

◇‘황제는 돌고 도는 것 내년은 내 차례?’
제17차 당대회에서 시진핑과 리커창은 중국공산당 5세대의 후계자가 됐다. 중공중앙정치국상무위원으로 승진했다. 두 사람의 서열은 5위와 6위다. 시진핑은 순위에서 리커창보다 한 단계 위다.
현재 시진핑의 새로운 직무는 중공중앙정치국상무위원, 중공중앙서기처서기, 중공중앙당교교장, 중공중앙 홍콩·마카오 공작소소조장, 국가부주석이다. 이는 후진타오가 총서기를 인계 받을 때의 직무와 기본적으로 같다. 따라서 시진핑이 제18차 당대회에서 중국공산당 제5세대 지도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중국은 포스트 덩샤오핑 시대부터 이미 포스트 권위시대로 들어섰다. 마오쩌둥과 덩샤오핑과 같은 권위자가 후계자를 지정하는 것과 같이 쉬운 방식의 후계자 계승은 이미 역사적 과거사가 됐다.
장쩌민은 자신의 의중에 있는 사람을 후계자로 지정하지 못했다. 천량위의 앞길을 지켜주지도 못했다. 후진타오는 천량위를 무너뜨릴 수는 있었지만, 리커창을 후계자로 지정할 정도의 성망을 갖추게 도와주지 못했다.
중국공산당 5세대 새로운 지도자 자리는 결국 누가 차지할까? 현시점은 아직 경합하는 시기다. 최종적으로 결정되지 않았다. 천하를 다스리는 자리는 지모만으로 얻을 수 없다. 안정과 신중함으로 큰 그릇은 될 수 있을지라도, 공적을 갖추지 못한 채 단순한 무위의 다스림 만으로는 천하를 얻을 수 없다.
포스트 권위시대는 범용의 시대다. ‘황제는 돌고 도는 것, 내년은 내 차례?’의 시대이기도 하다. 시진핑이 현재 후계자 레이스의 선두를 달리고 있다 해도 승리의 날까지 지금같이 계속 달릴 수 있을까? 아니 중간에 도태할 것인가? 세월과 지혜의 시련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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