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방은행 한국 대출금 상환연기 의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미.일.유럽의 주요 금융기관들이 29일 한국에 대한 대출을 더 이상 줄이지 않기로 결정함으로써 한국의 외환위기는 이제 본격적인 수습국면에 접어들게 됐다.

또 이들 국제 금융기관들은 단기 대출금의 상환만기를 연장하고 별도로 신규자금을 공급하기로 하는 방안도 논의중이다.

이 방안이 결정되면 우리 기업이나 금융기관들은 다시 국제 금융시장에서 외화 조달의 물꼬를 틀 수 있게 됐다.

이와 관련, 월스트리트 저널지는 30일 미 은행 등이 한국 정부에 대해 1백억달러 가량의 신규대출을 검토하고 있다고 관계자들의 말을 인용, 보도했다.

특히 이번 결정에는 시티은행 등 미 6대 민간은행과 골드먼 삭스 등 대형 증권사, 일본의 도쿄미쓰비시은행 등 10개 주요 은행, 독일의 도이체 방크 등 수십개 유럽 은행이 참여함으로써 그야말로 전세계적인 대한 (對韓) 금융지원이 이뤄지는 셈이다.

지난 24일 IMF와 미.일 정부 등이 한국에 대해 1백억달러를 조기지원하기로 결정하고 이번에 민간 금융기관들이 이같은 결정을 내려 한국의 외환위기를 둘러싼 분위기는 이제 순풍 (順風) 으로 바뀌었다.

국제 금융 관계자들은 "이번 결정으로 한국은 국제 금융시장에서 다시 신인도를 회복하고 외환위기의 우려를 불식시킬 수 있을 것" 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국제 금융기관들의 이번 결정은 만기가 돌아오는 대출금을 무조건 연장해 준다는 것이 아니다.

한국 기업.금융기관의 신용등급에 따라 대출금 일부 또는 전부를 회수하되 전체적인 대출규모는 가급적 현수준을 유지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미국의 블룸버그.CNBC 등 경제전문 언론들도 이날 국제 금융기관들의 한국지원을 주요 기사로 보도하고 "이런 모임은 매우 이례적인 것이며 이제 한국에 대한 국제 금융시장의 신뢰가 급속히 회복될 것으로 보인다" 고 논평했다.

미 증시에서는 이 소식이 '아시아 금융위기 완화' 로 해석돼 다우 지수가 전날보다 1백13포인트 오르고 한국 지원에 관련된 주요 금융기관들의 주가가 일제히 상승했다.

현지 관측통들은 "미 은행들이 내년 2월께 한국에 대해 신디케이트 론을 제공하면서 한국 정부측과 구체적인 액수와 조건을 놓고 협상을 벌일 예정인데, 이 과정에서 미 금융기관들이 큰 이익을 볼 것이란 점이 작용한 것같다" 고 말한다.

관측통들은 또 한국 지원에 참여한 미 증권사들은 곧 발행될 국채 인수업무와 채권시장 진출에 흥미를 갖고 있다고 전한다.

이 과정에서 미 금융기관들은 한국 기업.금융기관에 대한 대출금을 한국 정부나 중앙은행이 지급보증하라는 조건을 내걸 것으로 예상된다.

한편 관계자들은 국제금융계의 이번 한국 지원은 한국이 IMF와 합의한 경제개혁 및 시장개방 프로그램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어서 앞으로도 IMF 지원조건을 제대로 이행함은 물론 이에 대한 실천 의지를 거듭 확인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일부 관측통들은 그러나 "미 정부나 금융기관들은 이제 한 고비를 넘긴 한국 정부가 구체적인 협상조건을 둘러싸고 '분에 넘친 요구' 를 할 가능성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 고 전한다.

또 일각에선 '부도위기에서 벗어났다' 고 간주하는 것은 성급하다는 지적도 있다.

국제 금융기관들은 각국 정부의 요구와는 관계없이 '위험하다' 싶으면 언제든지 발을 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국제 금융기관들이 한국 지원에 나선 것도 한국의 국가부도가 자신들에게 돌아올 피해를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뉴욕 = 김동균 특파원, 김형기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