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삼칼럼]후회는 한번으로 족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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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나라가 이 지경, 이 꼴이 된데 대해 YS나 경제관료들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책임을 YS나 경제관료들의 무능.무지에만 돌려버릴 일은 결코 아닐 것이다.

그 많은 전문연구기관들은 그동안 도대체 무얼 했나. 그 내로라 하는 교수와 전문가들은 다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나. 또 사회의 감시자를 자임해온 언론은 언제 한번 제대로 된 경고음을 발한 적이 있었던가.

그동안 한국경제의 추락 가능성을 심도있게 파헤쳐 강한 경고음을 발해온 쪽은 오히려 외국의 전문기관이나 학자.전문가, 그리고 언론들이었다.

제 발밑이 무너져 내리는데도 모르고 있었던 우리의 지식사회. 옆에서 남들이 위험하다고 외쳐주기까지 했는데도 알아듣지 못했던 무능과 자만. 정말로 창피스러운 건 우리의 경제실력이 아니라 냄비바닥처럼 얇은 지적 (知的) 두께다.

그러나 이제 와서 지난 일을 어찌하겠는가.

지난날의 무지와 태만, 터무니없는 자만은 이미 '엎질러진 물' 이라고 치자. 문제는 지금도 우왕좌왕하기만 할뿐 금융위기를 해결할 처방은커녕 위기의 원인에 관한 제대로 된 분석이나마 내놓고 있는 전문기관이나 학자를 찾기 어렵다는데 있다.

모두가 한목소리로 국제통화기금 (IMF) 이나 미국의 요구조건을 빨리 받으라고 경쟁적으로 외치고 있을 뿐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금융위기가 이것 가리고 저것 뺄만큼 한가한 처지에 있지 않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래도 명색이 전문기관이요, 학자요, 영향력 있는 언론이라면 냉정하고 심도있는 분석과 평가로 조금이라도 더 국익을 크게 할 대안을 제시해 주어야 마땅하다.

이제까지 나온 소리라곤 그저 문을 더 열어라, 요구를 모두 받아들여라 하는 단순한 외마디말 뿐이다.

그나마 지난일이 부끄러워서인지, 아니면 사태를 분석하고 분명한 처방을 제시할 능력이 없어서인지 신문지면에는 전문기관이나 학자들의 목소리보다 신문기자들의 외침이 더 요란하다.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행정관료나 부도.도산의 위기에 몰린 경제계라면 무슨 돈이든 많이 얻어오기만 하라고 바랄 것이다.

그러나 명색이 학자나 전문가라면 자세가 좀 달라야 할 것이다.

어떤 조건아래 받는 것이 합당한 것인지, 그것으로 해서 장차 어떤 현상들이 빚어질 것인지,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그것에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등을 제시해주어야 할 것이다.

부끄럽고 민망스럽게도 이번에도 그런 역할을 해주고 있는 것은 외국 언론이요, 학자들이다.

IMF가 우리나라에 제시했던 조건에 대해 미국 하버드대 제프리 삭스 교수는 경제활동을 위축시키는 무리한 긴축요구며 '과잉살육' 이라고 비판했다.

또 독일의 디 차이트도 IMF의 긴축재정에 의존하는 처방은 실효성이 낮다고 비판했는가 하면,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는 국제신용평가회사들이 한국의 신용등급을 태국.인도네시아 수준으로 낮춘데 대해 강한 의문을 제기했다.

IMF의 조건이 옳은지, 그 비판자의 주장이 옳은지를 당장 가려낼 수는 없다.

그러나 어찌됐든 국가 운명이 걸린 우리 자신의 중대한 문제에 관해 우리 내부의 논의가 활발하지 못한 것은 창피스럽고 안타까운 일이다.

지난 4일에 있었던 한 학술심포지엄에서는 경제학자들이 오늘의 위기에 대해 준비해 오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직도 국민총생산 (GNP) 중심의 발전주의적 발상에 젖어 있는 것은 '역사적 범죄' 라는 지탄이 있었다.

외국자본이 우리에게 개방을 요구할 때는 그것이 자신들에게 최대한의 이익이 되는 방향일 것만은 뻔한 일이다.

개방과 세계화가 불가피한 세계적 추세임에 틀림없지만 개방과 세계화가 곧바로 발전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세계화된 앞으로의 사회는 오로지 "20%만이 유복해지고 80%는 불행해지는 '20 대 80의 사회' '5분의1의 사회' 다" (세계화의 덫 : 한스 피터 마르틴.하랄드 슈만.영림 카디널) 라는 지적도 있다.

경고도 없이 닥친 경제파탄이 '국치 (國恥)' 라면 일을 당하고도 전문가들이 논리적 분석이나 대응조차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것은 '제2의 국치' 다.

학자와 전문가, 그리고 언론은 이제부터라도 눈을 부릅뜨고 우리 사회의 경보장치가 돼야 한다.

후회는 한번으로 족하다.

유승삼 <중앙m&b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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