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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처 투자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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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소말리아 해적이 등장하기 오래전인 15세기에도 아프리카 항해는 두려움 그 자체였다. 유럽인들이 동방의 향료를 손에 넣어 큰돈을 벌자면 아프리카 남단을 도는 새 항로를 개척해야 했다. 그러나 대서양을 접어든 뒤 얼마 못 가 소용돌이와 암초, 집채만한 괴물이 도사린 ‘암흑의 녹색 바다’가 있다는 전설이 걸림돌이 됐다. 포르투갈의 엔리케 왕자가 10여 년간 거액의 사재를 들여 출항시켰던 선단도 번번이 겁을 먹고 되돌아오곤 했다. “그 어떤 위험도 커다란 보상에 대한 희망을 넘어설 순 없다. 용기를 쥐어짜라.” 1434년 왕자의 대담한 명을 받든 질 아이네스가 마침내 공포를 이기고 보자도르 곶까지 항해하는 데 성공한다. 유럽에 ‘대항해 시대’의 막이 열린 극적인 순간이었다.

평생 항해를 후원하며 부를 축적한 엔리케 왕자는 오늘날로 치면 벤처 투자가와 다름없다. 당시 장비와 항해술로 새 항로를 개척한다는 건 실패할 확률이 높았지만, 성공하면 일확천금을 얻을 수 있는 ‘고위험 고수익’ 사업이었던 것이다. 안정된 정치의 길을 버리고 일생을 모험에 베팅했던 엔리케 왕자야말로 진정한 ‘벤처 정신’의 선구자라 할 만하다.

이처럼 모험을 사랑하는 자본가들의 뒷받침이 없었다면 세상을 빛낸 무수한 아이디어들은 싹을 틔우지 못했을 터다. 토머스 에디슨의 백열전구도 그중 하나다. 전구가 발명되기 훨씬 전부터 거금 30만 달러를 투자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이가 바로 미국의 전설적 금융가 존 피어폰트 모건이다. 검증된 사업을 선호했던 모건이 불확실한 벤처 투자에 나선 건 전기 기술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그 덕에 매디슨가에 있던 모건의 집은 뉴욕에서 최초로 전깃불을 밝힌 주택이 됐다. 뒷마당에 발전기를 설치하는 바람에 소음과 화재가 잇따랐어도 기꺼이 참아냈을 정도였다.

경제 위기로 주춤하긴 했지만 벤처 투자는 여전히 매력적이다. 그저 돈벌이가 아니라 새 세상을 여는 개척자가 될 수 있으니 말이다. “평범하게 사는 선례를 만들겠다”던 전임 대통령 아들 눈에도 그 일이 멋져 보였나 보다. 벤처에 관심이 많다더니 회사원 신분으로 여러 군데 거액을 투자했다 한다. 하지만 벤처 투자가라 하기엔 남세스럽다. 아버지 보고 돈 대준 물주가 따로 있으니 말이다. 대박 나면 제 차지요, 쪽박 차도 손해날 것 없는 땅 짚고 헤엄치기다. 엔리케 왕자와 모건을 빛나게 한 건 위험을 무릅쓰고 자기 재산을 아낌없이 걸었던 벤처 정신이었다. 이걸 모르고 흉내를 내느니 차라리 평범한 회사원으로 남았다면 사달은 면했지 싶다.

신예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