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제원의 캘리포니아 골프 <55>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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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호 16면

해령은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천재 골퍼다. 그녀는 미국 아이비리그의 명문 대학 출신이다. 반면 성미수는 헝그리 골퍼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녀에게 골프는 빈곤을 벗어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다. 두 사람은 운명적으로 맞대결을 펼친다. 누가 이길까. 결론은 뻔하다. 성미수가 가난이라는 핸디캡을 이겨내고 마침내 승리한다. 물론 쉽지는 않다. 무인도에 가 혹독한 지옥 훈련을 견뎌내고서야 성미수는 비로소 골프에 눈을 뜬다. 이상은 골프 선수의 애환을 다룬 이현세씨의 작품 『버디』의 줄거리다.

미셸 위의 웃음, 신지애의 눈물

그런데 어디서 많이 본 스토리 같다. 현실이 때로는 만화보다 더 드라마틱하다. 윤해령은 미셸 위, 성미수에겐 신지애의 얼굴이 오버랩된다. 미셸 위는 누구나 아는 천재 골퍼다. 어렸을 때부터 한몸에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온 골프 스타다. 지난해 손목 부상을 당한 이후 성적이 부진한 건 사실이지만 그의 잠재력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17일 끝난 국내 여자 골프대회에 출전한 그의 샷은 시원시원하기 짝이 없었다. 페어웨이 우드로 티샷을 해도 다른 선수들이 드라이버로 샷을 한 것보다 공이 멀리 날아갔다. 스윙 자세도 완벽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여전히 2%가 모자랐다. 미셸 위에게 물어봤다. 지난해 슬럼프에 빠졌을 때 기분이 어땠느냐고. 그는 활짝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처음엔 눈앞이 깜깜했다. 그렇지만 아직도 슬럼프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손목이 아팠을 뿐이고 부상만 낫는다면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이제 과거는 잊고 앞날만 생각하고 싶다.”

미셸 위가 샷을 하는 것과 비슷한 시기, 신지애의 얼굴은 TV 연예 프로그램에 나왔다(오래전 녹화한 것이지만). ‘무릎팍 도사’에 출연한 신지애는 어려웠던 지난날을 회상하며 펑펑 울었다.

“엄마의 목숨과 바꾼 돈 1700만원을 밑천 삼아 골프를 쳤다.”
신지애가 중3 때 교통사고로 어머니를 잃었다는 건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 신지애가 어머니를 잃고 병원에서 먹고 자면서 동생들 병 간호를 하고 있을 때 미셸 위는 ‘골프 천재 소녀’란 말을 들으며 LPGA 투어에 출전해 티샷을 했을 터다.

미셸 위와 신지애. 이제까지 한번도 같은 조에서 동반 라운드한 적은 없다. 그러나 두 선수의 만남은 운명적이다. 피할 수 없는 맞대결은 시간문제다. 한 명은 어렸을 때부터 탄탄한 포장도로를 달려온 골프 천재, 또 한 명은 울퉁불퉁한 가시밭길을 거치고 나온 골프 지존.

만화에서는 성미수가 윤해령을 꺾었다. 현실에서도 지금까지는 신지애가 미셸 위에게 한발 앞선 형국이다. 그러나 최종 승자가 누가 될지 속단할 수는 없다. 미셸 위는 일단 부족한 2%가 뭔지 스스로 깨닫는 것이 급선무다. 이걸 깨닫지 못하면 승산이 없다. 반면 역경을 극복하고 일어서 어린 나이에 부와 명예를 거머쥔 신지애에겐 달콤한 현실이 치명적인 독이 될 수도 있다. 20대 초반, 걸출한 두 여자 골퍼의 샷 대결은 이제 겨우 시작이다.

“여기 있는 이 순간을 즐겨. 많은 갤러리와 시선들, 멋진 경쟁자들과 함께한 너의 현재가 나중에 멋진 과거로 남게 될 거야.”

『버디』의 주인공 구현우가 성미수에게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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