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포커스]"약속을 깨소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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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뉴욕 타임스는 1945년 4월13일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설에서 앞으로 1백년 후에도 사람들은 루스벨트가 그 어두운 시대에 미국의 대통령이었다는 사실에 무릎을 꿇고 신에게 감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루스벨트는 위대한 대통령의 한 사람으로 미국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지난 50년동안 이승만 (李承晩)에서 노태우 (盧泰愚) 까지 대통령.국무총리 등 집권자 모두 정상적이 아닌 최후를 맞거나 퇴임후 법의 심판을 받는 것을 목격한 우리에게 이런 루스벨트 찬양은 동시대에 일어난 일이라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

김영삼 (金泳三) 대통령도 가장 무능한 대통령으로 평가받고 퇴임후가 불안하다.

싱가포르의 리콴유 (李光耀) 전총리는 필리핀의 경우를 예로 들면서 지도자 한 사람 잘못 뽑으면 나라가 간단히 황폐해진다고 설명했다.

"마르코스 대통령 같은 지도자를 만난 필리핀은 최대의 가정부 수출국으로 전락했다.

그런 대통령 아래서 5년 임기면 나라가 황폐해지고 5년을 더하면 다음 한두세대까지 파산한다.

" 우리는 경제의 부도위기를 김영삼 대통령의 임기초가 아니라 임기말에 맞은 것을 신에게 감사해야 하는가.

우리는 지난 18일 어떤 대통령을 뽑았을까. 그가 한국의 대통령이 된데 대해 우리가 1백년 후에도 감사하게 생각할 수 있는 대통령일까. 1백년은 고사하고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이 임기를 마치고 물러나는 2003년으로부터 5년후, 10년후 그는 어떤 평가를 받고 있을까. 어제 아침 가진 첫 기자회견에서 밝힌 포부를 보면 그는 한국이 맞고 있는 위기와 도전에 대한 충분한 통찰력과 대응전략을 갖고 있다.

두말할 것 없이 가장 중요하고 화급을 다투는 문제는 지금의 금융.외환위기 해결이다.

대선기간중 IMF와의 재협상을 주장해 크게 의혹을 샀던 그가 거듭 협약의 성실한 이행을 천명한 것은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김대중 당선자는 선거기간중 너무 많은 것을 약속했다.

그의 공약은 뷔페식당의 식탁 같다.

남북관계에서 그린벨트에 이르기까지 문제라는 문제는 남김없이 나열한 인상이다.

남북관계와 그린벨트 문제를 1년안에 해결하고 IMF체제는 1년반안에 졸업한다고 약속했다.

교육예산을 국민총생산의 6%로 늘리고, 벤처기업을 일으켜 50만개의 일자리를 만들겠다고 한다.

앞으로 2년 또는 3년동안 허리띠를 졸라 매야 하는데, 보상에 70조원 이상이 드는 그린벨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한다는 것인가.

교육예산을 늘리고 농어민의 부채를 해결하는 재원 (財源) 은 어떻게 조달할 것인가.

투자축소, 낮은 성장률과 달러 강세로 개인소득이 1만달러 아래로 떨어지고 있는데 2000년대초에 소득 3만달러의 세계 다섯번째 경제대국으로 만들겠다는 약속은 실현 가능한가.

김대중 당선자의 약속에는 거품이 많다.

약속 일부를 깨야 한다.

당장 자민련과의 내각제 약속부터 문제다.

약속대로 2년3개월만 대통령을 한다는 전제로 내각제 개헌을 위해 정치판을 흔들면서 다른 국정 현안을 제대로 다룰 수 있을까. 남북관계의 1년내 해결은 당치 않은 생각이고 2000년대초 소득 3만달러는 꿈같은 이야기다.

취임후 첫 1백일이 5년 임기 전체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한다.

현실적인 수단이 뒷받침하는 소수의 국정목표를 설정해 국민적.초당적 역량을 결집할 것을 기대한다.

경제 일으키기와 남북문제 돌파구 찾기의 첫 단추만 잘 끼워도 탁월한 대통령으로 평가받을 것이다.

통일보다 평화를 기본으로 삼는 김대중 당선자의 북한정책은 가장 현실적이다.

지역갈등 해소와 우리의 도덕적 혼미상태는 지도자가 확고한 비전과 방향만 제시하면 극복될 것들이다.

역대정권들은 지연과 학연 같은 원초적 집단의 틀을 못벗고 스스로 갈등의 원인을 제공했다.

새 대통령은 퇴임 5년, 10년 후에도 존경받고 있을 계몽된 대통령이기를 바란다.

김영희 국제문제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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