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도는 경제대책 실상…'현장'과 거리가 먼 땜질만 뒤풀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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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자금시장이 완전 마비상태에 빠졌는데도 정부가 내놓는 대책은 핵심은 피한 채 변죽만 울리고 있다.

따라서 효험을 보기는 커녕 오히려 시장의 불안감만 키우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그나마 나왔던 대책들은 그야말로 '땜질식' 발상에 현장감이라곤 전혀 없는 것들이어서 도움을 주겠다는 당사자들의 불만과 빈축만 사고 있다.

시급한 상황에 정부가 내놓은 대책들이 어떻게 겉돌고 있는지 진단해 봤다.

◇ 콜자금 공급 종용 = 정부는 벌써 여러차례 부총리가 직접 나서서 은행장들을 모아놓고 종금사들에 콜자금을 대주라고 강권해 왔다.

그러나 은행들의 종금사 기피는 더욱 심해졌을 뿐이다.

은행들이 콜자금을 공급하지 않는 근본원인을 외면한 채 무작정 돈만 대주라는 요구는 실효성이 없다는 게 이미 증명됐다.

갑작스런 9개 부실종금의 영업정지로 크게 물려있는 은행들은 지금 '정부 말을 믿다가 또 당할 수는 없다' 는 생각뿐이다.

◇ 종금사 어음 담보대출 = 9개종금 업무정지로 기업들이 여기 맡겼던 돈을 뺄 수 없게 되자 한은은 해당 종금사에 맡긴 예금을 담보로 다른 종금사나 은행이 대출해 주도록 하겠다고 발표했다.

돈을 대주겠다는 은행이나 종금사가 있다면 영업정지된 종금사의 동의를 얻어 인출정지된 예금을 담보로 돈을 빌릴 수 있다.

문제는 아무리 담보를 들고 가도 돈을 빌려주겠다고 나서는 곳이 없다는데 있다.

금융기관 스스로가 부도위기에 처한 판에 신규대출은 고사하고 기존대출의 연장만이라도 해주면 감지덕지라는 게 기업들의 하소연이다.

◇ 수출지원조치 = 수출착수금 영수한도 한시 폐지, 수출용 원자재 외상수입기간을 늘리려는 정부의 조치는 수출에 도움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당장 급한 것은 그게 아니라 은행들의 수출환어음 매입과 신용장개설 기피를 해결하는 일이라는 얘기다.

무역업체들은 수출환어음 매입기피로 인해 외상수출의 만기가 돼서야 수출대금을 받거나 다른 돈을 융통해 수출대금을 충당하다보니 자금난이 가중되고 있다.

이 때문에 바이어들이 수출계약 물량을 줄이거나 수출계약 자체를 아예 취소하고 경쟁국으로 이탈하기도 한다는 게 무역업계의 주장이다.

또 지난 3일부터 수출환어음 담보대출이 시행됐으나 은행의 일선창구에서는 통하지 않고 있다는 게 무역업계의 얘기다.

◇ 예금자 보호조치 = 정부는 지난달 25일 3년간 원리금 전액 보장대상을 양도성예금증서 (CD).개발신탁.채권.환매조건부채권 (RP) 등으로 확대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RP의 경우 은행권에서 취급하는 경우만 보장이 됐고, 증권사나 종금사가 취급하는 RP는 보장대상에서 제외됐다.

이 때문에 고려증권이 지난 5일 부도를 냈을때 고려증권에서 RP를 매입한 신용협동조합등의 영세금융기관들은 돈을 받을 길이 막막했다.

결국 증권당국은 5일 밤 황급히 증권관리위원회를 열어 증권사에서 취급하는 RP에 대해 증권감독원의 고려증권에 대한 실사가 끝난 후 현금상환을 해주도록 했다.

한편 은행권과 비은행권에서 같은 상품에 대한 예금보장이 다르다는 데서 비롯되는 혼선은 계속되고 있다.

예컨대 산업금융채권 등 은행발행 채권이나 은행.증권 RP는 보장대상이지만 종금사가 취급하는 RP나 채권은 제외된다.

재경원은 이에 대해 ▶예금보호기금에 출연료를 내는지 여부 ▶예금 성격이 있는지 여부에 따라 적용이 엇갈린다고 설명하고 있으나 예금자 입장에서 보면 헷갈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 증권사 부도처리 = 전격 부도처리된 고려증권도 어찌보면 겉돈 정부대책의 희생양이다.

고려증권은 정부로부터 업무정지조치가 내려진 9개 종금사의 하나인 고려종금에 8백억원 정도의 콜자금을 빌려줬다가 이를 돌려받지 못하자 졸지에 심한 자금경색을 겪게 됐다.

문제는 부도 이후에도 발생했다.

고객자산 보호에 대한 대비책이 허술한 상태에서 예탁금 반환을 급작스럽게 하다보니 구멍이 여기저기서 생기고 있다.

특히 계좌이관.예탁금인출 등 주요 업무가 증권전산의 처리용량 부족으로 제때 이뤄지지 않아 고객들의 항의가 빗발치는 등 큰 혼선을 빚게 했다.

계좌이관의 경우 빨라야 2~3일이 걸려 원할 때 주식을 팔지 못한 투자자들은 앉아서 손해를 봤고 예치금 인출도 신청건수의 절반정도만 이뤄지고 있는 실정이다.

서명수.김종수.신성식.이상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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