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라라'와 KGB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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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63년 봄 당시 소련 국가보안위원회 (KGB) 소속 공작원이었던 17세의 한 소녀가 프랑스로 망명해왔다.

'베라' 라는 가명으로 불린 이 소녀는 자신이 고교재학중이던 16세 때 KGB에 의해 공작원으로 발탁돼 극히 비인간적인 훈련을 거쳐 '섹스 머신' 으로 활약하기까지의 경위를 낱낱이 공개해 충격을 주었다.

KGB가 '제비' 라고 불리는 젊은 여자공작원들을 양성해 '제비집' 이라는 일류 호텔급 건물에서 외국 고위층을 상대로 '섹스 작전' 을 펼쳐 왔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도 이때였다.

베라가 그동안 익힌 섹스 기술로 KGB 대령을 구워 삶아 동독을 거쳐 서방세계로 탈출했을 즈음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전설적 연인 올가 이빈스카야는 8년간의 강제노동형을 선고받고 복역중이었다.

60년 파스테르나크가 70세로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대표작이며 노벨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했던 '닥터 지바고' 의 주인공 '라라' 의 실제 모델인 이빈스카야는 48세였다.

49년 반체제 작가 파스테르나크를 도왔다는 이유로 4년간 복역했던 그녀가 그의 사망 이후 똑같은 죄목으로 다시 8년형을 선고받은 것은 순전히 소설 '닥터 지바고' 때문이었다.

소련에서 출판되지 못하고 56년 이탈리아에서 출판된 이후 58년 노벨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되는 등 전세계에 선풍적인 화제를 일으키자 KGB는 그 파급효과를 막으려 그녀를 다시 강제노동 수용소에 처넣은 것이다.

복역 초기였던 61년 이빈스카야가 흐루시초프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게 보낸 편지가 최근 한 잡지에 공개되면서 그녀가 KGB 첩자였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모양이다.

편지에 따르면 그녀가 KGB에 얼마간 협조한 것은 사실인듯 싶지만 이탈리아에서의 출판을 1년반 가량 늦추게 했다든지, 파스테르나크로 하여금 외국인과 접촉을 못하게 했다는 따위의 사실만으로 KGB 첩자로 모는 것은 지나친 면도 없지 않다.

베라의 증언이 보여주듯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KGB의 속성 탓일게다.

어쨌거나 소설은 물론 영화와 그 주제가 '라라의 테마' 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닥터 지바고' 의 '라라' 는 정치적 격동기 '러브 스토리' 의 주인공이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분단체제와는 또 다른 '철의 장막' 속의 희생자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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