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에메랄드 궁전의 추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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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말을 하고 나서 나는 먼저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잠시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표정으로 여전히 걸음을 옮겨놓지 않았다.

그러자 뒤따라온 승합차에서 빵빵, 경적이 울렸다.

돌아보니 그제서야 제정신이 돌아온 듯한 표정으로 그녀가 승합차를 향해 손을 한번 들어보이고는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디귿자형으로 지어진 뒤편 건물의 위치는 예전 그대로였다.

하지만 위치만 똑같을 뿐 함석지붕과 콘크리트 담벽으로 삼십년 이상을 버티고 있던 당시의 단층 건물은 아니었다.

예전 건물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다 새로운 이층 건물을 올렸다는 걸 단박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이다.

기억을 더듬을 필요도 없이 나는 왼쪽 현관으로 들어가 곧장 오른쪽 복도로 꺾어졌다.

그리고 두번째 교실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출입문 위쪽의 유리를 통해 안쪽을 들여다 보았다.

교실에는 물론 당시의 흔적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교실 뒷부분에 흥건하게 고여 있는 늦은 하오의 햇살, 거기서 아련한 기억의 세계가 아지랑이처럼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잠시 뒤, 열쇠 꾸러미를 손에 든 당직 여교사가 나타나 교실 출입문을 열어주었다.

감색 투피스차림의 여교사가 문을 열어주고 돌아가자마자 일행은 안으로 들어가 촬영 준비를 시작했다.

이예린이 구성안을 들여다보며 뭔가를 메모하는 동안 나는 이곳저곳을 살피며 천천히 교실 뒤편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교실 뒤편의 창문 앞에 서서 물끄러미 건물과 건물사이에 조성된 아담한 화단을 내다보았다.

하지만 열여덟이었던 그때, 나를 사로잡고 있던 뜨거운 열기는 살아나지 않고 덧없는 세월의 허물만 느껴져 기분이 이를 데 없이 막막해졌다.

- 비가 오는 날, 멜라니 사프카를 듣고 있으면 저절로 눈물이 나 젊다는 게 축복이 아니라 고통으로 받아들어질 때, 그래서 내 가슴의 에메랄드 궁전에서 광채가 스러질 때… 그럴 때가 나는 가장 견디기 힘들어, 타인을 사랑하는 게 형벌처럼 느껴질 때가 있거든. 내가 열여덟이었던 그해 가을, 이미랑 선생은 지금 내가 선 이 창가에 서서 물끄러미 비 내리는 세상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겪고 있는 사랑의 고통에 대해 반쯤 넋이 나간 듯한 표정으로 내게 힘겹게 말했었다.

그 깊은 혼돈의 시간, 나는 그녀가 타인을 사랑한다는 사실 때문에 끔찍스런 형벌의 고통을 체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동료 교사와의 사랑과 이별, 그리고 무성한 소문에 시달리며 날마다 생기를 잃어가던 그녀로 인해 그때 내가 겪어야 했던 형벌의 고통을 그녀는 끝끝내 눈치채지 못했으리라. 마흔셋이 된 지금까지, 내가 멜라니 사프카를 듣지 못하는 정서적 불구로 살아왔다는 걸 그녀는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선생님, 그렇게 서 계시니까 뒷모습이 너무 허전해 보여요. 저 좀 돌아보세요. " 창밖으로 향했던 시선을 거두고 뒤를 돌아보자 이예린이 다소 안쓰럽다는 눈빛으로 물끄러미 나를 올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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