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패밀리까지는 건드리지 않기로 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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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노무현 전 대통령의 형 건평씨가 박연차 회장을 세무조사로부터 구하기 위해 지난해 가을 추부길씨를 만났다고 한다. 추씨는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의 비서실 정책기획팀장과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을 지냈다. 건평씨는 추씨에게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서로 대통령 패밀리(family)까지는 건드리지 않기로 하자. 우리 쪽 패밀리에는 박연차씨도 포함시켜 달라.” 이것이 도대체 무슨 언사(言辭)인가. 마피아나 조직폭력배끼리의 불가침 제안인가.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건평씨의 ‘패밀리’론에는 노무현 권력집단의 심각한 도덕적 구멍들이 숨겨져 있다. 노 전 대통령은 형을 ‘시골에서 농사나 짓는 힘없는 사람’으로 옹호했었다. 그러나 건평씨는 농협에 압력을 넣어 증권회사를 인수하도록 하면서 수십억원을 챙겼다. 박연차 회장과 다른 기업인의 불법자금을 여당 후보에게 중재하거나 배달하기도 했다. 야당 의원에게 여당 입당을 회유했다는 증언도 있다. 건평씨가 이런 전방위 권력·부패 행각을 벌인 데에는 대통령의 패밀리는 불가침의 성역이라는 비뚤어진 법의식과 시대착오적 권력욕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건평씨는 박 회장처럼 친구이자 후원자로 대통령 집안을 도운 사람이라면 역시 ‘사법적 패밀리’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런 패밀리 의식은 비단 건평씨뿐이 아닌 것 같다. 박 회장과 수백만 달러의 이상한 돈거래를 한 대통령의 조카사위나, 세무조사 무마 청탁에 개입한 대통령의 고향친구나 모두 패밀리 의식의 공범자다.

건평씨의 패밀리론은 노무현 정권을 넘어 역대 정권의 권력 핵심부가 가지고 있던 집단적 면죄의식과도 무관치 않다. 전두환·김영삼·김대중 대통령 정권은 모두 대통령의 핏줄이 부정부패에 연루돼 사법처리를 받았다. 돈뿐이 아니라 인사 등 국정 전반을 농락하는 전횡을 일삼았다. 이는 모두 ‘내가 대통령의 동생이나 아들인데’라는 비뚤어진 특권·면책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느 정권이나 대통령의 패밀리는 권력 거품의 가마에 올라타게 된다. 자신이 뿌리쳐도 유혹의 손길들은 ‘정권의 대군(大君)이나 왕자’들을 가만두지 않는다. 권력이란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인데도 어느덧 가마에 올라타 보면 정권이 바뀌어도 자신들은 불가침의 성역일 거란 착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사법의 칼은 날카로워 권력이 바뀌면 패밀리는 1차적인 주목의 대상이 된다. 이는 이명박 정권이나 후임 정권도 마찬가지일 게다. ‘시골의 힘없는 농부’가 역설적으로 계언(戒言)만큼은 하나 확실하게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