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낙원에 웬 비명…늘어나는 대가족 '감량경영'짜낸 묘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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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토끼는 감격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내가 ‘동물의 낙원’ 과천 서울대공원에 오게 되다니…. ” 멀리서 본 풍경은 근사했다. 평온한 기운에 아이들의 웃음소리. 지금까지 살아온 경기도 용인 농가의 토끼장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가 내린 곳은 조랑말처럼 생긴 ‘꽃말’우리였다. 여남은 마리의 토끼와 꽃말이 따사로운 가을 햇살 아래 뛰어놀고 있었다. 귀여운 꼬마들이 과자를 던져주며 재롱을 부릴 땐 더없이 행복했다.

일주일쯤 지났을까. 사육사 아저씨가 친구 셋과 함께 ‘동양관’건물 안으로 그를 데려갔다. ‘겨울이라 실내에 넣어주는구나’하는 토끼의 기대는 그러나, 고개를 들고 혀를 날름거리는 7m짜리 ‘그물무늬 왕뱀’ 앞에 서는 순간 산산조각이 났다.

“키윽, 키윽.” 강아지의 낑낑거림을 연상케 하는 비명이 그가 이세상에 남긴 마지막 목소리였다. 순식간에 관람객 10여명이 모여들어 뱀 입으로 들어가는 토끼를 신기하게 바라봤다.

토끼가 동물원에 간 까닭은 식성이 까다롭기로 소문난 파충류의 먹이가 되기 위함이었다. 3∼4마리를 단숨에 먹어치우는 이 왕뱀은 죽은 고기를 절대로 입에 대지 않는 것은 물론, 수틀리면 단식투쟁을 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부득불 가엾은 토끼를 보름마다 4마리씩 넣어줄 수밖에 없다. 매일 수십마리의 라테(쥐의 일종)와 생쥐도 뱀과 도마뱀을 사람들에게 구경시켜주기 위해 목숨을 잃는다.

얼핏보기에 동물원은 안락하다. 이곳에 오는 짐승들은 자유를 반납하는 대신 평화와 풍요 속에서 천수를 다할 듯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도 죽음과 고통이 존재한다. ‘평등’마저도 허물어지기에 일부 동물의 아픔은 더 크다.

서울대공원의 동물 3백60여종 가운데 가장 호강을 누리는 것은 침팬지·오랑우탄·고릴라·돌고래 등이다. 이들은 사육사들의 관심과 애정을 듬뿍 받으며, 신나는 하루하루를 보낸다. 중류층의 생활을 누리는 건 기린·코뿔소·개코원숭이 등. 아시아물소·사슴·유럽불곰·라마 같은 녀석들이 제일 서럽다. 비좁은 숙소에서 늘 고달픈 나날이다.

이들의 계층이 나뉘는 기준을 설명하려면 ‘희소성의 원칙’ ‘수요-공급의 법칙’같은 경제학 용어들을 들이대야 한다. “다루기 까다롭고 번식이 잘 안되는 짐승들에게 많은 신경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종들이 야생환경에서도 희소한 거고, 그에 따라 값도 비싸죠.” 이규학동물부장은 “튼튼하고 새끼 잘 낳는 친구들이 괄시를 받는 건 불가피한 현상”이라고 말한다.

이같은 동물들의 신분차는 날씨가 쌀쌀해지면서 더 두드러진다. 세살배기 침팬지 ‘똘똘이(시가 7천만∼1억원)’. 보일러가 쩔쩔 끓는 2층짜리 독실에서 사과·요구르트를 먹으며 넉넉한 겨울을 보낸다.

코뿔소(4천만∼5천만원)는 10평 남짓한 공간에서 한쌍이 지내니 그럭저럭 괜찮지만, 몸집이 황소만한 아시아물소(50만∼2백만원)는 10평에서 암놈 6마리가 함께 살아야 한다. 숫놈 3마리는 더 불쌍하다. 열대 동물인 이들 앞엔, 맨땅에서 겨울을 지내는 ‘혹한기 지옥훈련’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숙소 수용한계 때문에 생기는 안타까운 일이다.

차별은 이성관계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다.

귀한 동물들의 경우 이부장이 '동물들의 생명을 좌우하는 외로운 결단' 이라고 표현하듯, 짝 맞추기에 지극정성을 쏟는다.

최악의 경우 '합방 사고' 로 1억원이 넘는 '귀하신 몸' 을 잃게 되니 그럴 수밖에 없다.

쾌적한 '신혼방' 만들기는 물론 사람나이로 치면 환갑인 20살짜리 침팬지까지도 '혹시나' 하며 신방을 꾸며줄 정도다.

"사람이야 중매든, 연애든 좋고 싫은 의사표현을 하지만, 동물이 어디 그런가요. " 반면, 식구가 너무 불어 골치인 유럽불곰이나 아시아물소.사슴등은 좁은 우리에서 바글바글 살도록 한다.

짜증과 신경전으로 번식욕망은 꺾인다.

어쩌다 '관계' 라도 갖고나면 '새끼가 또 생기면 어떻게 하지?' 라는 걱정이 태산이다.

'적자생존 (適者生存)' 이라더니 이 울타리 안에선 '적자고통 (適者苦痛)' 인가.

불쌍한 토끼.쥐들이지만 매년 봄이면 작으나마 위안을 받는다.

대공원 남쪽에 세워진 '동물위령비' 에서 동물부장 이하 전 직원들이 추모제를 치러주기 때문이다.

이날, 이들은 제상에 올라온 북어도 뜯고, 떡도 먹으며 모처럼 한풀이를 한다.

사람들이 따라주는 술도 한잔 걸치면서 '에이, 짐승팔자가 다 그렇지' 하는 푸념을 늘어놓고 나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그러나 춥고 긴 겨울이 성큼 다가와 있고 봄은 너무 멀다.

과천=강주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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