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청론]포스코경영연구소 유한수 소장…'위기'밝히고 국민협조 구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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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의사표시는 꼭 말로만 하는게 아니다.

몸짓 발짓등 각종 제스쳐도 의사소통을 하는 훌륭한 방법이다.

그런데 의사소통 수단으로 제스쳐를 쓸 때는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상대방이 자기 방식으로 해석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미국사람들이 엄지와 검지를 모아 둥글게 만들면 OK라는 사인이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이것이 단순이 '0' 을 의미할 뿐이다.

같은 제스쳐가 일본이나 한국에서는 '돈' 을 상징한다.

이같은 문화적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가 단일 문화민족인지 의아스러울 때가 많다.

정부의 의사표시가 시장에 전혀 먹혀들지 않기 때문이다.

기아사태의 경우를 보자. 해결방법을 둘러싸고 이해당사자간 논란이 있었다.

정부는 시장원리대로 처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장원리대로라면 채권자와 채무자가 합의하면 그만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옆에서 헛기침을 하면서 각종 시그널을 채권단에게 보냈다.

채권단은 정부의 진의를 정확히 파악못해 갈팡질팡하느라고 시간을 끌었다.

상대가 자기 제스쳐를 못 알아들을 때는 분명한 소리로 의사표시를 해야한다.

그렇지 않고 알아듣지 못하는 상대만 탓하고 있으면 어떤 문제든 해결할 방법이 없다.

어느 나라든 정부의 정책은 문서의 형태로만 발표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정부가 보내는 시그널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상대가 알아듣게 확실히 해야한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으면 서로 탐색전을 펼치다 기아사태처럼 정책의 타이밍을 놓치게 된다.

얼마전 홍콩의 증시폭락 여파로 미국 증시도 동반 폭락했을 때 클린턴 대통령이 "미국경제는 아무 문제없다" 고 호언하자 증시는 즉각 반등세로 돌아선 적이 있다.

지도자의 자신감이 국민들에게 신뢰를 준 것이다.

국가위기시 지도자의 리더십은 이만큼 중요하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왜 나를 욕하는거지, 내가 뭘 한게 있다고" 라고 대꾸했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다.

노대통령 비슷하게 인도의 라지브 전총리도 재임중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는 비난을 들었다.

그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무일도 안한게 아니다.

여러가지 대안을 충분히 검토해서 아무것도 안하는게 제일 좋다는 결론을 냈을 뿐이다.

" 얼핏 듣기에는 궤변 같지만 무능과 부작위 (不作爲) 는 큰 차이가 나는 것이다.

우리의 현상황은 어떤가.

무능인지 부작위인지 알기 어렵게 되어있다.

외환위기를 보고도 속수무책이라면 무능이다.

개입해봤자 막을 방법도 없고 당분간 이대로 방치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했다면 부작위이다.

그러나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키로 한 것을 보면 부작위는 아닌 듯 하다.

구제금융을 받을 정도면 정부가 법정관리를 신청하는 셈 아니냐는 여론도 있다.

이러다 경영권 포기각서 같은 것을 쓰는게 아니냐는 농담도 오간다.

이런 상황에서 정말 필요한 것은 국민의 동참의식이라고 생각된다.

정부는 위기임을 솔직히 인정하고 국민의 자제와 협조를 구해야 한다.

최고지도자부터 전용기대신 민간항공기를 이용하고 전국민은 해외여행경비로 쓰다남은 몇 달러라도 은행에 들고와 맡기는 운동을 펼치는게 어떨까. 기업도 어려움에 처하면 노사간 결속이 더 강해지게 마련이다.

모처럼 온 국민이 한데 뭉치는데 이만한 기회가 어디 있겠는가.

유한수 <포스코경영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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