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거리 살리는 아름다운 간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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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가장 오래된 광고매체인 간판은 그 시대의 문화를 대변하는 정보 전달 매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처음에는 상품 자체를 간판으로 삼았으나 점차 글씨와 그림을 사용해 다양해졌다. 신기술과 소재의 발달로 디자인에 중점을 둔 개성 있는 광고물의 출현으로 간판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간판을 비롯해 빌보드.현수막 등과 같은 옥외광고물은 도시의 수많은 건물의 외벽을 이루며 단조로운 도시 환경에 활력과 생기를 불어 넣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 이 옥외광고물은 안타깝게도 도시 경관을 훼손하는 주범이 되고 있다. 너무 많은 옥외광고물은 이제 거리까지 점령하고 있다. 건물의 면적이나 광고물의 크기에 비해 지나치게 큰 문자와 복잡한 정보들, 발광체나 점멸과 같은 자극적인 재료와 단순한 원색의 무분별한 사용으로 우리의 눈을 지치게 한다.

서울시는 청계천 복원과 함께 인근 종로 거리의 재개발로 서울을 새로운 도시로 거듭나게 하는 사업을 추진 중이다. 무계획적이고 무질서하게 난립한 간판들을 수준 높은 디자인으로 교체하고, 노후한 건물의 전면부를 깨끗하게 정비할 수 있도록 점포주의 간판 정비와 건물주의 리모델링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 무엇보다 주목되는 것은 디자인 측면이다. 종로 업그레이드 프로젝트의 가이드라인을 보면 판형 간판을 배제하고 다양한 재료를 이용한 입체형으로 유도하고 있다. 시범간판을 보면 획일화나 거리의 정체성 확립이 우려되는 면도 없지 않으나 시도 자체는 바람직하다.

중앙일보 조사에 의하면 1998년 이후 서울시로부터 '좋은 간판상'을 받은 가게는 대부분 성업 중이다. 정비에 성공한 예는 서울 노유거리에서도 볼 수 있다. 예쁜 간판으로 매상도 오르고, 외국인 관광객과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간판은 블록별로, 거리 단위로 한꺼번에 정비해야 효과가 크다'는 사실을 입증한 셈이다. 올 들어 많은 지방자치단체에서도 가로정비 사업을 추진하고 있거나 계획 중인 것도 이런 까닭이다.

도시의 간판을 위시한 가로경관은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다. 우리의 생활 모습과 문화, 그리고 경제상황이 세월을 쌓아가며 이뤄낸 산물이다. 난립이라고 일컬어지는 간판 또한 그 자체가 바로 우리를 상징하는 문화인 것이다. 그러나 난립해 도시의 경관을 해치고 각각의 간판 정보마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대대적인 정비 사업을 하게 되는 것이다. 짧은 시간에 진행되다 보면 여러 가지 부작용도 발생할 수 있다. 사업 목표와는 관계없이 개별 점포주가 강력히 거부할 수도 있으며 가로 경관과 조화를 이루며 개성적인 수준 높은 디자인이 적용되지 못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가능한 한 이런 부작용을 최소화해 새로운 간판으로 참신한 거리문화를 이끌어내도록 해야 한다.

현재 전국에서 진행되거나 계획 중인 정비사업을 보면서 유럽의 거리가 부러워지는 것은 단순히 다른 문화에 대한 동경이거나 우리의 현실을 파악하지 못하는 무지에서가 아니다. 그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낸 그들의 생활문화 자체가 현재의 도시 모습에서도 훌륭한 경관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와 같은 대대적인 환경정비 사업에 의해 좋은 간판을 달아 아름다운 도시 경관을 형성한 것이 아니었다.

유럽의 어느 도시 이미지를 서울에 이식시키는 것이 아닌, 우리의 건물과 도시 이미지로 우리의 문화를 나타내는 도시의 모습이 만들어져야 한다. 이런 것이 정부 주도나 어떠한 사업에 의해 완성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에 앞서 지금부터라도 내 가게의 간판을 객관적인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 크고 화려한 간판이 건물과 또는 다른 가게의 간판들과 어떻게 연계돼 있는지, 효과를 생각하지 않고 그저 남의 간판에 견주어 내 간판을 크게 주문하지는 않았는지 스스로 점검해 봐야 한다.

김성훈 세명대 교수.광고홍보학, 한국옥외광고학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