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홍준이 본 광주비엔날레…깔끔한 전시만큼 열기 못따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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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미술평론가라는 꼬리표를 끝내 감추진 못했지만 나는 순수한 한 관객으로 이번 전시회를 맘껏 즐겼다.

단체관람 온 초등학생들의 긴 행렬을 어쩔 수 없이 뒤따르다가 때로는 앞질러 건너뛰면서 눈에 띠는 작품 앞에선 제법 머무르곤 했다.

요셉 보이스의 공격적인 냉소, 이브 클랭의 물질성에 대한 집요한 탐색, 존 케이지의 허망한 몸부림, 브루스 노만의 신경질과 넋두리, 신디 셔먼의 깔끔한 암호성…. 역시 거장은 달랐다.

내가 그 이름값에 끌려 긴 시간을 할애했다손 치더라도 거장은 거장다운 데가 확실히 있었다.

관람객들은 여전히 소란스러웠고, 설치미술과 비디오 아트엔 낯선 표정으로, 전통적인 회화 작품에선 안도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비엔날레의 묘미는 역시 새로운 가능성에 도전하는데 있다.

친숙한 과거보다도 불확실한 미래를 점유해가는 창조, 그런 창조는 언제나 아름다운 것이다.

빌 비올라의 10분짜리 비디오 '교차' 는 비디오 아트의 아름다움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거대한 화면 양쪽으로 작가 자신이 서서히 걸어나와 이윽고 한쪽은 불, 한쪽은 물에 휩싸이는 이 웅장한 작품은 장중한 사운드, 아름다운 영상, 긴장된 반복동작등이 어울리는 움직이는 그림이다.

'영화의 회화화 (繪畵化)' 라고나 할까. 강익중이 초콜렛 맥아더를 만든 '8490일의 기억' 은 설치미술의 마력을 보여준다.

그는 9척 장신의 맥아더상 앞에 1천4백장의 손바닥만한 종이를 깔아놓았는데 관객들이 이 종이에 무엇이 쓰여있는가를 보도록 맥아더의 쌍안경 같은 것을 갖다 놓았다.

거기에는 깨알만한 글씨로 박혀있는 영어단어 메모로 가득하다.

그 끔찍스러운 수고로움이 동반되는 손작업을 마다하지 않는데 관객은 감동하고 또 안심한다.

그리하여 저 초콜렛 맥아더의 달콤함과 오만을 모두 이해하기 위해 지불한 노력과 고통의 의미가 전해지는 것이다.

그렇게 전시장을 둘러보고 나니 제1회전 때보다는 훨씬 정리되고 정제된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1회전 때의 박력과 힘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이번 전시의 성과를 두고 요즘 설왕설래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 문제는 하나를 얻고 하나를 잃은 선택에 있었던 듯하다.

오히려 더 큰 문제는 전시기획자의 유도대로 성실히 관람했음에도 이번 전시 주제인 '지구의 여백' 은 감지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속도.공간.혼성.권력.생성등 다섯개의 소주제로 나눈 것은 이해됐지만 그것이 어떻게 오행 (五行) 과 연결시켰는지 더욱 이해가 안 되었다.

오행엔 상생 (相生) 과 상극 (相克) 이 있어서 매우 유기적인데 다섯 소주제는 그저 나열식이었다.

기획자는 지나치게 친절하려 했거나 지나치게 현학적이었다는 평을 면키 어려울 것 같다.

결과적으로 제1회전은 커미셔너들이 자신은 감추고 작가를 돋보이게 하려고 노력한 반면 제2회전은 소주제에 맞추어 작품을 배치하다보니 오히려 커미셔너의 구상이 더 드러나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깔끔한 만큼 열기가 죽어보였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두차례의 경험을 바탕으로 제3회전을 서서히 생각해 볼 때인 것 같다.

유홍준<영남대 교수·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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