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리마다 성이요, 5리마다 곽’ 연암도 중국의 담이 궁금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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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호 10면

연암 박지원 선생은 1780년 음력 6월 한양을 떠나 베이징(北京)으로 향한다. 청 건륭제(乾隆帝)의 칠순 잔치를 축하하기 위해 떠나는 사신 행렬을 따라서다. 약 2개월간에 걸쳐 중국 북부 지역을 돌아보고 난 뒤 저술한 책이 『열하일기(熱河日記)』다.
그 일기 한 대목에 이런 인상기가 나온다. “3리마다 성(城)이요, 5리마다 곽(廓)이다.” 선생이 압록강 건너의 책문(柵門)을 지나 만리장성의 관문 중 하나인 산해관을 거쳐 다시 베이징 인근에 이르는 동안 줄곧 눈에 띄었던 한 현상에 대한 서술이다.

유광종 기자의 키워드로 읽는 중국문화-담<2>

곳곳에 놓인 성과 곽이 선생의 눈에 들어온 모양이다. 성은 일반적인 성채를 말한다. 곽은 그에 비해 더 규모가 큰 성곽이다. 3리마다 성을 발견하고, 5리를 더 지날 때면 더 큰 성이 놓여 있는 정경. 지금으로부터 불과 220여 년 전의 중국 북부 지역에는 왜 성곽이 곳곳에 있었던 것일까.

박지원 선생의 궁금증은 사신 일행이 베이징 교외에 도달했을 때 극에 달한다. 베이징에서 차로 1시간 남짓 걸리는 지금의 퉁저우(通州)란 곳으로, 베이징 입경 직전 마지막 점검을 하는 마을에 사신 행렬이 도착했을 때다. 그 마을에도 ‘도대체 이해하기 힘든’ 성곽이 쌓여 있었다.

사물의 실용적 쓰임새에 관심이 많았던 선생은 급기야 마을 촌장을 찾아가 묻는다. “마을에 왜 성을 쌓았느냐”는 것. 촌장은 그러나 질문자의 의도와 다른 대답을 한다. “청나라 군대가 (명 나라를) 쳐들어올 때도 이곳은 함락되지 않았다”는 내용이었다.

산시(山西)성 핑야오(平遙)에 있는 교가대원(喬家大院)의 일부 모습이다. 대부호였던 교씨들이 살았던 명·청 연간의 대저택이다. 사방이 높은 담으로 둘러졌고 각 구역도 역시 높은 담으로 구획돼 있다. 장이머우 감독의 영화 ‘홍등(紅燈)’을 촬영한 장소로도 유명하다.

한국의 마을 모습은 대개 비슷하다. 별다른 경계선 없이 마을 초입에 세워 놓은 장승이 마을의 구역을 표시하는 상징이 된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도 양반집 저택 말고는 각 주택들의 담은 그저 싸리로 엮은 것이거나 아무리 심해도 낮은 돌담 이상의 것이 세워져 있지는 않다.

그러나 중국의 마을은 군사적 용도로 보이는 높은 벽돌담이 둘러져 있거나, 사각에는 역시 전쟁 상황을 상정하지 않고는 필요가 없을 듯한 망루(望樓)까지 세워져 있었다. 물론 지금의 중국 마을에서 이런 용도의 성채를 발견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최소한 박지원 선생이 연행 사절을 따라 들렀던 200여 년 전의 중국에는 그 담이 아주 흔했던 것이다.

조선 마을의 모습만 보아온 박지원 선생에게 중국의 담과 성곽은 낯설었을 게다. ‘왜?’라는 의문이 머리를 가득 채웠을 법하다.
조상께서 그런 의문을 품으셨다면 후손인 우리들은 그 해답 찾기에 나서는 게 도리다. 중국인이 담과 성곽을 즐겨 쌓았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작은 담 얘기부터 해 보자. 중국인의 전통적인 주택은 사합원(四合院) 형태다. 사방에 견고한 벽돌담이 둘러져 있고, 안과 밖은 조그만 문을 통해서만 서로 통할 수 있는 공간구조다. 정통 사합원은 남북을 축으로 동서 대치형의 직사각형 건물이 2중 또는 3중, 아니면 그 이상(돈 많고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그 도수가 많아진다)으로 겹쳐져 평면으로 확대되는 모습이다.

사합원의 건축적인 의미는 여럿이지만 우선 눈에 띄는 점은 남과 나의 엄격한 구분이다. 나와 동류(同類)의 사람이 아니라면 문 밖에서 그저 서성일 수밖에 없는 게 특징이다. 달리 보면 ‘나’를 침범할 수 있는 ‘남’을 사전에 막기 위한 방어와 수비의 개념에 가깝다.

사합원 형태의 주택은 연원이 깊다. 2000여 년 전인 서한(西漢) 때 만들어진 도기 형태의 유물 중에는 방어와 수비의 개념이 전제된 축소형 가옥이 있다. 중국이 거대 통일 왕조로 구성되던 시기에 이런 형태의 주택이 이미 자리를 잡았다는 얘기다.
베이징의 자금성은 어떤가. 붉은색이 칠해진 황궁의 담 높이는 평균 11m다. 높은 곳은 13m 정도. 한국의 대표적 왕궁인 경복궁의 담 높이가 3m 남짓에 불과한 점을 감안하면 상당히 높은 편이다.

담의 ‘두목’은 역시 만리장성이다. 춘추전국을 구성했던 수많은 나라가 앞다퉈 쌓았던 담을 진시황이 다시 축조하고, 왕조의 찬란한 역사만큼 장구한 세월 동안 역대 왕조들 역시 담을 축조하는 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마침내 명나라 때의 영락제가 견고하게 축조한 담이 만리장성이다.

중국의 평범한 백성의 주택이나 그 마을, 나아가 조그만 도시와 왕궁 등은 모두 담을 둘렀다. 유럽의 중세, 중국과 인접한 조선 등이 쌓은 담보다 중국인의 담은 높고 견고하며 결연하다. 중국의 역사에서 벌어진 수많은 전란(戰亂)이 그 건축의 심리를 읽는 요체다.


중앙일보 국제부·정치부·사회부 기자를 거쳐 2002년부터 5년 동안 베이징 특파원을 역임한 중국통이다.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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