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1000만원 주고 서체 개발하라니 좋은 작품 나오겠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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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대학 첫 수업에서 한글 디자인에 관심을 가진 후 줄곧 한 길을 걸어온 이용제 ‘활자공간’ 대표. [사진=김상선 기자]

“한글 디자인을 하는 디자이너들은 책임감이 있어야죠. 문자란 우리 생활에서 뗄 수 없는 도구이니 싫다고 안 쓸 수 있는 게 아니잖습니까”

『한글+한글디자인+디자이너』(세미콜론, 237쪽, 1만8000원)를 낸 이용제(37)씨는 선해 보이는 얼굴과 달리 ‘욕심’이 많았다. 한글 디자인 전공으로 최초의 박사이며 서체개발 회사 ‘활자공간’과 한글과 타이포그라피에 관한 토론공간인 카페 ‘공간 ㅎ’을 운영하며 홍익대에서 강의도 하니 말이다.

이번 책은 한글 디자이너 3세대인 그의 첫 저서. ‘디자인 네트’란 전문지에 연재하던 글을 묶었는데 가독성 실험의 신뢰성, 기계화 문제 등 귀 기울일 만한 주장이 적지 않다.

한글 디자이너에게 책임감을 요구하는 것도 그 중의 하나다.

“한글 디자이너에게 윤리적 사명감은 중요합니다. 시장논리에 맞춰 싼 값으로 짧은 기간에 서체를 개발하면 우리 모두에게 손해거든요” 살짝 불만이 엿보이기에 이유를 물었다.

“10년 전에는 새로운 서체를 개발하기 위해 1년간 1억 원을 들였는데 요즘은 1000만원을 주고 두 달 만에 개발하라니 좋은 작품이 나오기 힘들죠. 그렇다고 공들인 작품을 인정하는 안목도 부족하고 서체를 개발해도 저작권을 인정하지 않으니….”

한글 디자인은 영어 알파벳과 달리 품이 많이 든다고 했다. 알파벳이야 대소문자를 합쳐도 50자가 조금 넘지만 한글은 제대로 하자면 1만자 이상, 줄여도 2350자를 일일이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재능보다 정성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들렸다. 그는 왜 이 일을 시작했을까.

“1992년 홍익대 시각디자인학과에 들어가 첫 수업 때 안상수 교수님의 타이포그라피 설명에 그냥 끌렸어요.” 의외로 단순한 이유지만 이후 그는 한글꼴 연구회란 동아리 활동을 하는 등 한글 디자인에 빠졌으니 생의 절반 가까이 매달린 셈이다. 그런 그의 대표적인 작품은 2006년 선보인 세로쓰기용 서체 ‘꽃길’.

“가로쓰기가 편하긴 하지만 우리 세로쓰기 문화를 아예 폐기할 필요는 없다 싶어 만들었는데 의외로 수요가 많던데요.”

그는 잉크를 15% 정도 절약할 수 있는 환경친화적 서체 ‘아끼는 글자’도 만들었다. 활자 획 가운데 홈을 넣는 것이니 서체라 할 것은 아니지만 젊은 디자이너의 생각이 신선하다.

때로는 잘 나가는 대학동기들을 보면 잠깐씩 부러운 생각도 들지만 자기 생활에 만족한다는 그의 한글사랑이 어떤 결실을 맺을지 궁금했다.

 김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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