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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남은 한옥 1만 채의 소중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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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서울은 역사 도시다. 백제의 옛 도읍이었을 뿐 아니라 조선조 개국 이래로는 600년이 넘는 오랜 기간 수도로서 한민족의 정신적인 중심이 되었다. 태조가 도읍의 위치를 이곳으로 정한 것은 단지 풍수의 문제가 아니라 한강의 수운과 한반도 내의 전략적 위치를 감안한 합리적 판단에 근거한 것이었으며, 도성의 건설 또한 매우 계획적으로 이루어졌다. 태조와 그를 이은 왕들은 산줄기를 이용하여 적당한 크기의 둘레 성을 먼저 정하고 그 안에 왕조를 이끌 중심시설과 도로, 개천, 성문, 종루와 시장 등의 기반시설을 고루 배치하였다. 근대기 초 사진에 찍힌 서울은 산등성이를 뒤로 하고 높이 솟은 궁궐과 그 앞으로 기와집과 초가집이 가득 들어찬 그림 같은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도시를 형태적으로 구성하는 것은 길과 필지와 건물이다. 길은 인간이 땅에 그어놓은 선과 같은 것으로, 한번 길이 생기면 주변으로 건물들이 들어서게 되고 필지가 나누어지게 된다. 각각의 필지에는 제각각 소유자들이 생기게 되니, 그 위의 건물이야 시대에 따라 새롭게 지어지지만, 필지를 나누거나 합치고 길을 새로 내는 일 등은 무수한 분쟁 소지가 있기 때문에 쉽사리 일어나지 않는다. 더욱이 길의 변화는 바로 필지와 건물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도시의 구조를 결정짓는 것은 길이라고 할 수 있다. 건물은 길과 필지의 크기와 형태에 의하여 결정되는 가장 최종적 결과물이지만, 사람들의 눈에 들어오는 직접적 대상이기 때문에 도시의 이미지를 결정하는 요소가 된다.

서울의 역사성을 회복하는 일 역시, 길과 필지와 건물이라는 도시 형태의 3요소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야 한다. 가장 시급한 일은 길과 필지를 유지하는 일이며, 이에 더하여 그 위에 놓인 건물의 역사성을 회복하는 일이다. 여러 부정적인 시각이 있음에도 청계천 복원사업이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그것이 물길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최근 청진지구 재개발사업으로 피마길의 흔적이 사라졌고, 한편에서는 육조거리와 중학천의 복원계획도 발표되고 있으니, 역사 도시 서울의 정체성은 여전히 실험대 위에 놓여 있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서울시가 발표한 한옥 선언과 그 후속 작업은 위기에 처한 역사 도시 서울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절실한 노력으로 보인다. 일차적으로는 한옥이 더 이상 경제적 논리에 밀려 철거되는 것을 막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지만, 보다 근원적으로는 한옥들이 모여서 만들어낸 도시 조직의 보존을 꾀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의 주도로 일방적으로 추진되는 것이 아니고, 주민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하고 지원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점도 주목된다. 한옥이 가지는 전통적 생활양식의 유지는 개인적 취향의 문제지만, 연이은 기와 지붕에 나란한 담장이 만들어 내는 골목길의 정취는 서울시민 모두가 함께하는 공공재다. 이제 겨우 1만여 동 남은 서울의 한옥을 지켜내는 일은 역사 도시에 사는 서울시민의 의무다.

전봉희 서울대 교수·건축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