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분수대

두만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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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두만강을 건넜다가 곤욕을 치른 이는 소설가 김하기였다. 옌볜을 여행 중이던 1996년 여름, 귀신에 홀린 듯 달빛에 젖은 푸른 물을 밟으며 두만강에 뛰어들었다고 그는 회고한다. 분단과 미전향 장기수 문제를 천착해 오던 작가가 북녘 땅의 지척에 선 감회를 주체할 수 없었던 탓인지 모르겠다. 더구나 옌볜의 술집을 돌다 북한인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3차 술을 마신 뒤끝이었다. 우기에 불어나 강물은 성난 바다처럼 도도탕탕했다. 탈진한 그가 정신을 차린 곳은 건너편 회령 쪽의 강기슭이었다. 북한군 1개 분대가 그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동무는 남조선 수영선수인가.” 북한 수사요원이 처음 던진 질문이었다. 그는 줄곧 회령의 여관에 갇혀 취조를 받았다. “여기서 새 장가 들고 소설도 쓰지 않겠느냐”는 회유도 있었다. 스파이 혐의를 벗고 보름 만에 풀려나자 이번엔 국내 정보기관의 수사를 받을 차례였다. 소설을 쓰느라 훤히 꿰고 있던 미전향 장기수의 복역 현황과 답사여행을 하며 알게 된 휴전선 일대의 지형지물을 북한 수사요원에게 진술한 것이 문제가 됐다. 결국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가 인정돼 실형을 살다 7개월여 만에 특사로 풀려났다.

보름 사이에 남과 북에서 차례로 수사를 받고 진술서에 손도장을 찍는 경험은 극도의 정신적 상실감을 안겨 주었다고 김하기는 회고한다. 취조실과 재판정과 감옥을 전전하는 동안, 그의 뇌리에선 남북한 양쪽 모두에 환멸을 느끼고 결국 바다에 몸을 던지고 마는 소설 속 주인공 이명준(최인훈 『광장』)의 혼이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1980년대 시국사범으로 법정에 섰던 그가 “저는 시대의 몽둥이에 맞아 좌충우돌하다 ‘바킹’된 당구공에 불과합니다”고 한 최후 진술이 훗날 자신의 운명에 대한 예언이 될 줄은 본인도 몰랐을 터다.

두만강 언저리에서 탈북자 문제를 취재하던 미국 방송사 소속 여기자 2명이 북한에 억류된 지 일주일이 지났다. 마침 북한의 미사일 발사 실험 예고로 북·미 관계의 물줄기가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미묘한 시점이다. 그 때문에 본인들의 의사에 아랑곳없이 정치적 흥정의 소재로 변질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과거 사례를 보면 더욱 그렇다. 96년 역시 술에 취해 압록강을 헤엄쳐 건넜다가 신의주에 석 달간 억류됐던 미국 청년 에번 헌지커 사건은 동해안 잠수함 사건 등으로 꽉 막혀 있던 북·미 간 특사 파견의 구실로 활용됐다. 정작 풀려난 헌지커는 권총 자살로 짧은 생을 마감했지만 말이다. 한반도 분단이란 ‘시대의 몽둥이’에 잘못 맞은 당구공이 어디 김하기뿐이랴.

예영준 정치부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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