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그 불편함이 바람과 햇살, 자유를 선물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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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컴시티는 한 건물이지만, 하나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건물 사이가 뚝 떨어진 빈 공간으로 처리돼 언뜻 보면 건물 4채가 늘어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4층 건물의 1·2층은 이어져 있지만, 3·4층은 중간중간 공간을 비워두고 떨어뜨려 놓았다. 이 때문에 3층에선 옆 사무실로 가려면 한데로 나가 또 건물 안으로 다시 들어가야 한다.

그래도 이 빈 공간 덕에 웰컴시티 뒤의 주택들은 숨통이 트였다. 집 앞에 큰 건물이 들어서면 햇빛은 물론 풍경까지 차단된다. 웰컴시티의 빈 공간은 뒤에 있는 주택에 햇빛·바람·풍경을 가져다줬다. 건물 앞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건물로 가로막힌 풍경이 아니라 빈 공간을 통해 뒤편까지 볼 수 있다. 결국 웰컴시티는 장충동의 풍경을 부수지 않은 채 그 속으로 살며시 들어앉은 셈이다. 점심때면 사람들은 빈 공간에서 점심을 먹고 수다도 떤다. 바람과 햇볕도 느낀다. 이 공간은 거주하는 사람이 자유롭게 변형하며 쓸 수 있는 ‘창조적인 공간’이다.

이 건물은 ‘사람 냄새가 나는 건물’을 표방하는 대표적인 슬로 건축으로 꼽힌다. 느린 삶이 인간적인 삶이라고 믿는 슬로 건축가들은 ‘왜 건물은 편리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이를 설계한 승효상(57·이로재 대표)씨는 “불편한 공간을 걸으려면 행동이 느려지고, 생각할 여유가 생긴다. 트인 공간이 있으면 하늘과 풍경을 구경할 수 있다. 그게 사람 사는 모습”이라고 말했다.

건축가 정현화(61·구간건축 대표)씨는 2000년 서울 역삼동 언덕에 ‘필당(匹堂)’을 지었다. 330㎡ 대지에 지어진 이 2층짜리 단독주택은 길가에선 창만 몇 개 뚫린 흰 벽으로 보인다. 하지만 대문과 현관을 지나 집 안에 들어서니, 순간 땅과 하늘이 보인다. 거실이 있어야 할 집의 한가운데에 배롱나무 한 그루가 심어진 마당이 있다. 가운데 마당을 중심으로 ‘ㅁ’자 형태로 각 공간이 배치돼 있다. 각 방에 가려면 마당을 옆에 두고 되도록 많이 걷도록 설계했다. 동선을 최소한으로 만드는 현대 주택과 반대 방향으로 간 것이다. 마당에 있는 배롱나무는 4월부터 10월까지 빨간 백일홍을 피운다. 가을이 되면 단풍이 들고, 겨울이 되면 나무는 하얀 눈옷을 입는다. 습한 여름철에는 푸른 이끼가 마당 가득 끼었다가 날씨가 서늘해지면 스스로 사라진다.

“그리스어 어원으로 자연은 스스로 자라 늙고 사라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꽃 핀 나무에 날아든 벌처럼 마당에 잠깐 나타났다 혼자 사라지는 모든 것이 바로 자연입니다.”

“우리 선조의 집은 이런 자연을 즐기며 은유할 수 있었고, 이것이 슬로 건축이자 삶”이라고 정씨는 말했다. 필당은 ‘현대판 한옥의 재해석’이라는 세상의 평을 받았다. 이에 수많은 사람이 정씨의 집을 찾았다. 그는 이런 건축적 의미보다 아파트 생활을 청산하고 필당으로 이사 온 뒤 가족이 좀 더 가까워지고 건강해졌다는 데 더 큰 의미를 뒀다.

서울에서도 천천히 걸으며 생각할 수 있게 하는 슬로 건축은 많다. 서울 관훈동 ‘쌈지길’은 늘 시끌벅적한 소리로 가득하다. 건물 가운데에 놓인 마당과 마당을 둘러싸고 있는 길에 있는 사람들이 만든 소리다. 사람들은 건물을 올라갈 때 계단이 아니라 건물을 뱅뱅 둘러싸고 있는 길을 오른다. 이 길을 펴면 500m에 이른다. 인사동 길이 1㎞가 채 안 되는 걸 감안하면 길다.

한강 위의 작은 섬으로 옛 정수정이었던 서울 양화동 ‘선유도 공원’은 기존의 정수장 구조물을 남겨 옛 시간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옛 정수장의 기둥은 덩굴식물의 좋은 지지대가 됐다. 여러 갈래로 뻗어지는 길을 가다 보면 다양한 각도로 공원을 감상할 수 있다.

‘불편한 공간을 불평하지 않고, 그 안에서 사색할 마음을 갖는 것’. 이것이 느리게 살아볼 마음의 준비를 하는 첫 단계다.

글=한은화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최승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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