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안에 취직하자” ‘0시 클럽’ 백수들이 뭉쳤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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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두, 한번 빚어볼 수 있을까요?”

이달 7일 오후 서울 남대문시장. 김광섭(32)씨가 왕만두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 주인에게 넙죽 고개를 숙였다. 허락을 받은 뒤 식당 주인의 손놀림을 따라 모양을 내봤지만 마음처럼 쉽지가 않다. 김씨를 비롯한 청년 구직자 7명은 이날 시장 곳곳에서 좌충우돌 직업 체험에 도전했다. 이달 초 결성된 취업 스터디 ‘0시 클럽’ 회원들이었다. 고교·전문대 졸업자가 대부분인 이들의 목표는 ‘한 달 안에 취업하기’.

‘0시 클럽’ 회원들이 남대문시장의 한 식당에서 만두 빚기 체험을 하고 있다. 김광섭씨(오른쪽에서 둘째)는 “집 안에 틀어박혀 있을 때는 밖에서 이렇게 열심히들 살아가고 있는 줄 몰랐다. 일하고 싶다는 의욕이 샘솟는다”고 말했다. [조문규 기자]


김씨는 고교 졸업 후 중장비 부품 생산업체 정규직으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군 복무를 마친 다음엔 제조업체와 중국집 등에서 계약직·임시직·아르바이트를 전전해야 했다. 지난해 12월 다니던 자동차 부품업체와 재계약에 실패한 이후론 집안에 틀어박혀 인터넷 게임만 했다. “이러다간 영원히 실업자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란 절망감이 엄습해 왔다. 인터넷 카페 ‘백수회관’에서 ‘0시 클럽’ 결성 소식을 접하자마자 가입했다. 그는 이날 3개월 만에 ‘일’을 하며 구슬땀을 흘렸다.

또 다른 ‘0시 클럽’ 회원 한민수(27)씨는 떡집 앞에서 망설이고 있었다. ‘제가 한번 팔아봐도 될까요’란 말이 입에서 맴돌았지만 정작 튀어나온 소리는 “떡…1000원어치만 주세요”였다. 고교 졸업 후 편의점·주유소·노래방 등에서 일해 온 한씨는 주인이나 손님이 싫은 소리를 하면 참지 못하고 그만두곤 했다.

# 11일 낮 12시 서울 삼성동의 한 사무실. ‘0시 클럽’은 주중 매일 이 시간, 이곳에서 이력서 작성, 명함 만들기, 이미지 메이킹, 개인기 찾기 등을 함께 하고 있다. 불규칙한 실업 생활 속에서 매일 일정한 시간에 모이는 것도 훈련이라고 한다. ‘0시’라는 클럽 이름도 낮 12시에 모이지만 더 진취적으로 도전하자는 뜻에서 붙였다. 다음 달부터는 오전 9시로 앞당길 계획이다.

이날의 과제는 구직표를 작성하고 취업센터에서 상담을 받는 것. 특별히 모셔온 취업 컨설턴트가 구직표 작성 요령을 설명했다. ‘희망연봉’ 란 설명이 시작되자 회원 오승희(가명·34·여)씨가 “액수를 먼저 밝히지 말고 ‘회사 내규에 따르겠다’고 적는 게 낫다”고 거든다. 구직 사이트 접속과 이력서 작성이 오씨의 하루 일과다. 명문대 법학과를 졸업한 그는 행정고시 1차를 통과하기도 했지만, 부모가 잇따라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빚 보증에 집까지 날렸다.  

회원들은 서울시가 운영하는 ‘일자리플러스센터’로 옮겨 자신의 구직표를 놓고 상담을 받았다. 전문대 졸업 후 물류회사·식당 등에서 일해 온 이광철(32)씨는 물류회사 재취업을 원했다. 그가 “자꾸 움츠러든다”고 털어놓자 상담사는 “(실직한 지) 3개월밖에 안 됐는데 벌써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이력서만 쓰지 말고 물류회사 관련 정보들을 찾아다니라”고 했다. 한민수씨는 물류센터에서 책을 포장·배송하는 일을 소개받았다. “월급 104만원”이란 설명을 듣고 이력서를 보내보기로 했다.

센터를 나서는 이들의 표정에 아쉬움이 묻어 있었지만 예전 같은 낙오자의 얼굴은 아니었다. 실직 후 사회적 관계가 끊긴 채 ‘투명인간’처럼 살아가던 이들에게 ‘0시 클럽’은 다시 사람 냄새를 맡고 ‘백수 탈출’의 꿈을 품게 만드는 희망의 둥지다.

이충형 기자, 사진=조문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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