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선거운동으로 돌아가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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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외국인이 한국 대통령선거 이슈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언뜻 '안보와 경제' 라는 대답이 나갔다.

궁색한 나머지 멋쩍게 뱉은 우스개가 되고 말았다.

왜냐하면 국군통수권자의 두 아들이 빠진 60만 대군은 튼튼할 것인가는 은근한 안보이슈요, 초반 인기 1위를 달리는 후보 죽이기로 기업과 금융이 죽을 맛이니 중대한 경제이슈가 아닌가.

투표일이 두달 남짓 남았는데 선거전 메뉴라고는 병역시비와 묵은 쌈짓돈 공방 뿐이다.

사생결단을 내겠노라 단단히 폭약을 잰 메가톤급을 터뜨렸지만 폭삭했어야 할 인기순위는 움쭉도 않고 경제만 흔들리고 있다.

기아사태 등으로 5단계나 내려앉은 국가신인도 (信認度)가 또 한번 곤두박질할 것은 불을 보는 듯하다.

얼마전 뉴욕에서는 27개국에서 5백명의 상인들이 모여 세계 한인 무역인대회를 열었다.

달러를 아끼느라 실비호텔 싱글룸 바닥에 여럿이 누워자기도 하며 화상 (華商) 이나 유대상인 못지 않은 지구촌 네트워크를 다짐했지만 본국 정치판 소식에 맥이 풀리기는 매한가지였다.

얄궂게도 호텔 건너편 브로드웨이 한복판에는 21세기가 8백일밖에 남지 않았음을 알리는 밀레니엄 전광판 초침이 맥박처럼 뛰었다.

남들은 새로운 천년을 깨우는 모닝콜을 걸어놓고 있는데 한국은 92년 대선때 비자금 시비로 시계태엽을 2천일쯤 거꾸로 돌리고 있는 꼴이다.

미국도 대선자금 조사로 시끌버끌하다.

하지만 도마 위에 오른 것은 누가 먹어 챙겼느냐가 아니다.

모금방법이다.

왜 백악관 커피를 대접했느냐, 왜 모금운동에 연방정부 전화를 사용했느냐 등 간지러운 것이어서 수백억, 수천억 비자금에 익숙한 우리와는 부패의 몸집부터 다르다.

미국의 정치자금 시비는 돈 많이 드는 정치관행을 고치고 이익집단의 영향력을 줄이는 것이 목적이지 막바로 사람을 잡으려는 것이 아니다.

병역기피다, 성희롱이다 클린턴 후보를 홀랑 벗기면서도 그를 버젓이 재선시키는 것은 무엇을 말함인가.

"스캔들이오? 무슨 스캔들? 다우지수 (증권가의 산업지수)가 8천을 넘었다지요. " 미국 대중은 이렇게 딴전을 피운다.

느긋한 경제가 깔아 놓은 양탄자 위에서 벌이는 정치싸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코 어물쩍 넘어가지 않는 그들이다.

대통령을 만들어 놓고도 계속 괴롭히지 않는가.

소나기처럼 후드득 지나가는 정치탄이 아닌 때문이다.

한쪽에서 '먹었다' 폭로하면 '음해다' 라는 대꾸로 넘어가는 솜방망이 '먹음탄' 과는 탯줄부터 다르다.

더 중요한 차이점은 국민들의 태도다.

정치인이 얼마나 거둬들이느냐보다 그들이 낸 하드머니가 어떻게 쓰이느냐에 관심을 쏟는다.

우리는 그 반대가 아닌가.

뜯긴 자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소프트머니를 누가 얼마나 챙겼느냐는 푸닥거리 뿐이다. 기업인은 힘겹게 번 하드머니를 빨리고도 여론의 매를 맞고 망신살이 뻗치고 있다.

지금 미국에선 컴퓨터 칩부터 돼지고기 생산업체에 이르는 5백대 기업 연합세력이 신속처리권 (Fast Track) 이라는 무역협상권을 대통령에게 주자고 의회에 압력을 넣고 있다.

냉전때는 전쟁수행권을 쥐게 하더니 이젠 무역전쟁수행권을 대통령에게 주자는 발상이다.

인권.환경에 이어 부패라운드도 우리의 목을 죄고 있다.

우리 경제인들은 봉 노릇을 하며 더 이상 안팎으로 당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억수로 바치고도 정치자금 세탁법 하나 연계시킬 능력이 없다.

7월부터 낮잠자고 있는 정치자금 세탁방지법은 여야 모두 입법 의지가 없어 보인다.

돈줄이 막힐까봐 여야가 의기투합한 유일한 법이 아닐까. 유권자들은 이번 선거전에서 누가 국민이 원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지를 지켜봐야 한다.

국민은 폭로하지 않아도 알 것은 다 알고 있다.

후보들은 정상적 선거운동으로 돌아가 페어플레이와 신뢰를 보여라. 정치인들은 상대 후보 죽이기보다 자당 후보 이기기 전략을 드러낼 일이다.

최규장 <재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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