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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펜·아이팟·신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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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오카다 요시오가 1961년 커터 칼을 발명한 건 절실한 필요 때문이었다. 오사카의 인쇄공장 말단 직공이던 그는 종이 자르는 일을 했다. 손에 힘을 줘 칼질하다 보면 날이 금세 무뎌져 불편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어느 날 구두 수선공이 유리 파편을 칼날 삼아 쓰는 걸 봤다. 날이 둔해지면 그 파편을 다시 깨 사용했다. 격자 모양의 홈이 있는 초콜릿도 영감을 줬다. 칼날에 일정 간격으로 골을 파, 한 칸씩 잘라 쓰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헝가리 신문기자 라디즐로 비로는 다 쓴 원고에 잉크를 엎질러 낭패를 보곤 했다. 끈적한 윤전기용 잉크를 쓰면 되겠다 싶었지만 농도가 짙어 펜촉으로 흘러나오지 않았다. 화학자인 그의 동생이 43년 금속 볼 베어링으로 잉크를 밀어내는 방식을 고안했다. 볼펜의 탄생이다. 이를 가장 먼저 사용한 건 영국 공군이었다. 연합군의 제2차 세계대전 승리는 위험한 비행 중에도 볼펜으로 또박또박 좌표계에 목표물을 표시할 수 있었기 때문이란 해석도 있다.

이들의 발명은 과학적 대성취는 아니나 인류의 삶을 적잖이 바꿨다. 이미 있는 칼과 잉크를 ‘다르게’ 쓰는 법을 창안한 때문이다. 정보통신 업계에선 이처럼 뭔가를 쉽게 쓸 수 있게 하는 작업의 속내용을 사용자 환경(UI, User Interface)이라 한다.

혁신적 UI는 종종 기술적 진보를 압도한다. 닌텐도사가 2006년 말 내놓은 게임기 ‘위’가 그렇다. 경쟁사들이 고성능 기기 개발에 몰두할 때 닌텐도는 아예 ‘노는 법’을 바꿔 버렸다. 리모컨에 동작 인식 센서를 달아 온몸으로 운동하듯 게임을 즐기게 한 것이다. ‘위’의 지난해 말 기준 세계 판매량은 4500만 대에 이른다.

애플의 MP3 플레이어 ‘아이팟’도 역발상 UI의 산물이다. 복잡한 기능은 다 버리고 음향·화질에만 집중했다. 청바지 뒷주머니에 쏙 들어가는 날렵한 디자인으로 세계 젊은이를 사로잡았다. 애플 최고경영자 스티브 잡스는 “오직 중요한 건 사용자 눈으로 보는 것”임을 때마다 강조한다. 업자가 아닌 고객 입장에 서야 혁신의 길이 보인다는 것이다.

중앙일보가 대변신했다. 소비자 편에서 오래 숙고한 결과다. UI 혁신은 향유 방식을 바꾼다. 본지 독자는 이제 신문을 방바닥에 깔아놓고 보지 않아도 좋다. 지하철에서 불평을 사는 일도 줄어들 게다. 내용은 형식과 조응한다. 활짝 펼쳐 읽기 편한 모양새에 걸맞게, 그래픽은 시원해지고 기사는 고정 틀을 벗을 것이다. 발상의 전환은 판을 흔든다. 변화와 경쟁이 휘몰아치리라. 과실은 독자들의 몫이다.

이나리 경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