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과학기술 행정, 지난 1년간 무너진 느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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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년간의 시행 착오를 거울 삼아 부처별로 나눠진 연구소를 한곳으로 모으고 과학기술부를 부활시켜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상희 전 과기처 장관. [프리랜서 이순재]

“지난 1년 동안 시행착오를 겪었으면 이제 바로잡을 때다.” 교육인적자원부와 과학기술부를 통폐합한 지 1년이 된 지금 과학기술계에서 터져 나오는 목소리다. 과학기술계의 존재는 교육 현안에 묻혀 희미해져 가고, 이명박 대통령이 과학기술계를 챙긴다고는 하지만 과학기술계에는 그 온기가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무엇이 문제인지 그 대안을 과학기술계 원로인 이상희(71) 전 과기처 장관에게 들어봤다.

-이명박 정부 들어 새로 개편한 과학기술계의 문제는 무엇인가.

“과학기술이 그 중심과 방향을 바로 잡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국가 과학기술의 핵심인 정부출연연구소는 관할 부서를 교육과학기술부와 지식경제부로 반반씩 쪼개 놓고, 교육과기부는 교육 현안에 묻혀 과학기술을 제대로 챙기지도 못하고 있다.

헌법에 따라 지난 정권까지 존재했던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조차 ‘국가교육과학기술자문회의’로 명칭을 바꿔 교육으로 물타기를 하고 있을 정도다. 헌법에는 교육 관련 자문회의는 없다. 지난해 10월 말 이명박 대통령 주재로 열린 첫 ‘국가교육과학기술자문회의’만 봐도 이 정부가 과학기술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알 만하다. 그 회의에서 채택해 언론에 발표한 9개 주요 정책의제 중 과학기술은 두 가지밖에 없고 나머지는 교육 정책이었다.”

-그렇다고 방향까지 잃고 있다고 할 수 있나.

“국가 연구 개발을 실질적으로 총괄할 조직이 없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 연구개발은 각 부처로 쪼개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과학기술부도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그것을 대신할 강력한 힘을 가진 ‘과학기술 컨트롤 타워’가 없지 않은가. 대통령이 위원장인 국가과학기술위원회는 상설 사무국조차 없는 빈 수레와 같다.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부터 40년 동안 쌓아왔던 과학기술 행정체계가 무너진 듯한 느낌을 받고 있다.”

-교육인적자원부와 과학기술부를 통폐합한 것은 일본이 먼저 한 것을 배워왔다고들 한다.

“일본은 문부성(한국의 교육부)과 과학기술청을 통폐합해 문부과학성을 만들었다. 그러나 치밀하게 총리실 직속으로 장관급인 과학기술정책 대신을 별도로 둬 각 부처의 과학기술 정책을 총괄하고 있다. 일종의 ‘과학기술 컨트롤 타워’인 셈이다. 이 때문에 한국에서와 같은 문제가 거의 발생하지 않는 것이다. 일본을 배우려면 제대로 배워야 하지 않을까 한다.”

-정부 출연연구소를 절반은 교육과기부에, 절반은 지식경제부에 소속하도록 나눠놨다.

“지식경제부의 원조 격인 옛 상공부 시절 정부출연연구소들이 상공부 산하로 가기 싫어했다. 시장 논리로 연구를 바라보기 때문에 기업이 하지 못하는 장기 연구, 국정 과제를 수행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식경제부 산하 연구소에서는 벌써 그런 어려움을 호소하는 연구자들이 많다. 하루빨리 전체 연구소를 한 부처 산하로 이관하고, 단기 과제나 기업도 할 수 있는 연구에 매달리지 않게 해야 한다.”

-교육과기부에서는 세계 수준의 정부 출연연구소(WCI)를 만든다는 목표 하에 KIST를 시범으로 삼겠다고 한다.

“지금과 같은 체제에서는 성공하기 어렵다. 3년인 연구원장의 임기로 보나 연구원들이 임금을 연구과제를 수주해 벌어야 하는 기업경영식 현실은 대대적으로 수술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정권 교체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특별법을 제정해 추진해야 한다. 그런 안정된 환경이 갖춰지지 않고는 WCI는 헛구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교훈을 얻는다면.

“과학기술 정책은 대통령 프로젝트여야 한다. 과학기술은 집안의 어린아이와 같으면서도 한 나라의 힘을 키우는 핵심이기 때문에 대통령이 직접 챙기고 키워주지 않으면 자라기 어려운 속성을 가지고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그 일을 몸소 실천해 한국의 과학기술 토대를 마련했다. 최장수 과기처 장관이었던 고 최형섭 박사는 회고록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은 마치 본인이 과기처 장관이고, 장관이었던 자신은 비서실장인 듯했다고 비유했다. 그만큼 박정희 전 대통령이 과학기술을 챙겼다는 의미다.”

-어떻게 고쳐야 하는가.

“최우선으로 과학기술부를 부총리 급으로 독립시켜야 한다. 그게 여의치 않다면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사무국을 상설화하고, 정부 연구개발 예산의 기획·배분 기능을 줘야 한다. 이와 함께 국가교육과학기술자문회의에서 교육을 떼 내고, 연구개발 예산의 집행에 어느 정도 간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문에 힘이 실리지 않는다.”

-그게 가능하겠는가.

“국민이 이명박 대통령을 선택한 것은 치열한 국제 경제전쟁 현장에서 갈고 닦은 경륜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또 급변하는 실물경제에 대한 신속한 판단력과 과감한 결단력을 대통령의 강점으로 인식하고 있다. 대통령직 인수위와 그 참모들이 잘못 길을 닦은 것을 이제 알았을 것이기 때문에 대통령의 애정과 의지만 있다면 바로잡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본다.”

-만약 대통령이 나서지 않는다면 어떤 결과가 올 것으로 보나.

“강국으로 도약하는 길이 더 멀어질 것이다. 국가 발전의 핵심인 과학기술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면 그 공백은 10년, 20년 뒤에 큰 구멍으로 나타난다.

프랑스가 과학기술 분야에서도 강국이 된 것은 드골 대통령이 국정 목표로 해양개발과 항공· 원자력 세 가지를 정해놓고 지속적으로 직접 챙겼기 때문이다. 이는 대통령이 과학기술을 어떻게 바라보고, 챙기느냐에 따라 한 나라의 미래가 바뀐다는 역사적 사료인 것이다.”  


박방주 과학전문기자, 사진=프리랜서 이순재


◆이상희 전 과기처 장관=과학기술계의 산증인이다. 동아제약 연구개발본부 연구원으로 시작한 첫 사회 생활에서부터 과기처 장관, 4선 국회의원 시절에 이르기까지 과학기술계와 함께 했다. 국회의원 시절에는 국회 과기정보통신위원장을 맡았다. 한국생명공학연구원과 한국항공우주연구원·한국해양연구원의 설립을 위한 법적 토대를 마련한 주역이기도 하다. ▶현 대한변리사회장, 세계사회체육연맹 회장▶과기처 장관▶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위원장▶11·12·15·16대 국회의원▶서울대 약대(학사~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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