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기고]일본서 발견된 금동관 3점의 학술적 의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8면

중앙일보를 통해 공개된 재일교포 김형익 (金炯益.69) 씨 소장유물 (본지 20일자 1면.25면 보도)에 학계의 눈길이 쏠리고 있다.

고고학 자료에 의존도가 높은 가야사 연구자는 물론 금관 및 신라사 연구자들도 깊은 관심을 표시하고 있다. 새로 발견된 금동관의 학술적 가치를 국립김해박물관 준비실의 함순섭 학예연구사 (금관전공) 의 기고를 통해 소개한다.

최근 보도된 재일교포 김형익씨 소장품은 일제 강점기에 도굴.유출되었던 우리 문화재의 수난사를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사진과 기사로 공개된 금동관.금동제 신발.금제 귀걸이 등은 소장자가 매우 다양한 종류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수량 역시 8백여점에 이른다니 참으로 놀랄 만하다.

수난기에 유출된 이런 유물들이 한 재일교포의 노력에 의해 수집됐다는 것은 전공자의 한 사람으로서 매우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금동관 3점 가운데에는 아직 국내 학계에서 알려진 예가 없는 것도 있어 주목을 끈다.

우선 양산 출토로 알려진 출자형 (出字形) 금동관은 넓은 띠 (帶輪) 위에 4단의 나무가지 모양의 입식 (立飾) 이 세워진 형태다.

이는 머리에 썼을 때 위로 솟아오른 모양을 하는 천마총 금관 (국보제188호).금령총 금관 (국보제388호) 과 흡사하다.

넓은 띠는 단양 하리 (下里) 고분 및 동해 추암동 (湫岩洞) 21호분에서 출토된 동관 (銅冠) 과 유사한 점을 찾아볼 수 있다.

또 일본 군마현 (群馬縣) 마에바시시 (前橋市) 고분에서 나온 금동관과도 비슷하다.

제작시기는 천마총이나 금령총 금관보다 나중에 만들어진 것같다.

하지만 신라 세력이 중부지방에까지 영역을 확장한 이후에 제작된 단양 하리와 추암동 출토 동관 (銅冠) 보다는 앞서는 형태적 특징을 지닌다.

따라서 이 금동관은 신라관 (冠) 의 전기형태와 후기형태를 연결해주는 자료로서 매우 귀중한 학술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판단된다.

둘째로 왕비관이란 이름이 붙여진 금동관은 지금까지 학계에 보고된 예가 없는 형태다.

단순히 띠모양의 대륜만으로 된 관은 가야와 백제지역에서 출토된 예가 있다.

합천 옥전 (玉田) M6호분.함안 말이산 (末伊山) 34호분.익산 입점리 (笠店里) 1호분에서 출토된, 입식이 없이 아래.위 폭이 일정한 넓이의 대륜만으로 이뤄진 관들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윗부분이 톱니 모양으로 된 금동관이 알려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금동관 계통 추적에 새로운 사실을 담고 있다고 생각된다.

세째로 왕관형 금동관은 외형상 일본 나라 (奈良)에 거주했던 다마바야시 (玉林善太郎)가 소장했던 금동관과 매우 유사하다.

다마바야시의 금동관은 1967년 '고고미술 (考古美術)' 을 통해 국내에 간략히 소개된 적이 있다.

두 금동관을 비교하면 김씨 소장의 금동관은 다마바야시 소장품보다 둥글게 말린 입식이 하나 더 있으며 꼭지 부위에 새털 모양의 장식이 더 확연히 남아 있다.

중앙일보가 공개한 금동관 3점은 학계와 박물관의 자문을 얻어 가야 유물로 소개되었으나 학계에는 다소 다른 견해도 있다.

특히 출자형 금동관은 이제까지 출토된 예가 거의 신라지역에 집중돼 있어 신라관의 전형이라는 견해가 많다.

이같은 견해차이가 있더라도 중앙일보가 발굴.공개한 자료는 가야사는 물론 가야사와 중첩되는 5~6세기의 신라사의 영역문제 및 금관연구에 결정적인 자료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함순섭〈김해박물관 학예연구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