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에메랄드 궁전의 추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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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이예린씨… 더이상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지 말아요."

그녀를 건너다보며 사뭇 몽롱한 표정으로 나는 중얼거렸다.

날개 달린 원숭이를 부를 때 사용하는 주문을 그녀가 의도적으로 외고 왔건 아니었건, 결과적으로 그녀는 나의 과거를 끊임없이 자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그런 주문을 그녀가 외고 있을까. 아무리 머리가 비상하다고 해도 정말 기가 막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단하죠. 예스, 하고 대답해 주시면 더이상 혼란스럽게 만들지 않을께요. "

"… 오기욱이 올거요. "

"설마, 일부러 오라고 하신 건 아니겠죠?"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는 물었다.

"간단히 말합시다.

지금 나로서는 도무지 이예린씨에게 예스라고 대답할 수 없어요. 그런데도 이렇게 함께 앉아 술을 마신다는거… 이런 모순이 나를 혼란스럽게 한다는 거요. 명쾌하고 분명한 게 좋은데, 이상하게도 이예린씨에게는 감정이 애매해지는군요. "

"그런건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분명하니까. " 축축하게 습기가 느껴지는 눈빛으로 그녀는 나를 보았다.

"어떤 식으로 분명하다는 거요?"

"…"

나의 물음에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맥주병을 손에 들고 다소 몽환적인 표정으로 재클린 오나시스와 헵번의 패널이 걸린 검녹색의 우측 벽면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을 뿐이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 두명의 여자는 정마담이 특히 좋아하는 인물들이었다.

재클린 케네디였다가 재클린 오나시스가 된 여자, 그리고 '로마의 휴일' 에 등장한 순진무구한 공주의 이미지를 평생 유지한 여자. 그것은 서로 상반된 두개의 이미지가 기이한 조화를 나타내는 경우였다.

그래서 어쩌다 한번씩 그 패널들을 올려다볼 때마다 나는 극과 극이 조성해내는 신비스런 조화의 세계를 감지하곤 했다.

아득한 이쪽과 아득한 저쪽의 교류. 그래, 세상에는 언설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얼마든지 있는 법이었다.

마흔셋이 된 지금까지도 나는 환상이 유지되는 에메랄드 궁전에 살고 있지만, 환상이 깨지는 에메랄드 궁전으로 떠난 여자를 불화의 감정으로 생각해 본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살아서 두번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거리에 그녀의 궁전이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 그녀와 나 사이의 결속감을 단 한번도 부정적으로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과거는 과거, 현실은 현실이라는 식의 이분법적 발상으로 마음을 정리할 필요도 없었다.

사막한 세상을 견디게 해주는 기억의 궁전, 그런 것이라도 없었다면 어떻게 예까지 사람답게 흘러올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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