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용은 “내가 살아온 골프 인생보다 마지막 4개 홀이 더 길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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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4개 홀은 이제까지 내가 살아온 골프 인생보다 더 길었다.”

양용은(37·테일러메이드·사진)은 9일(한국시간) 끝난 PGA투어 혼다 클래식에서 우승을 확정지은 뒤 이렇게 말했다. PGA투어 첫 우승을 눈앞에 둔 4라운드 막판에 무척 긴장했던 모양이다.

이날 미국 플로리다주 팜비치가든스의 PGA내셔널 골프장 챔피언스 코스(파70·7158야드)에서 열린 혼다클래식. 버디 5개에 보기 3개로 최종 4라운드를 마친 양용은은 합계 9언더파로 미국의 존 롤린스(합계 8언더파)를 1타 차로 제치고 우승했다. <관계기사 23면>

양용은은 여러모로 최경주(39·나이키골프)와 닮은꼴이다. 무엇보다도 시골의 섬 출신이라는 게 그렇다. 최경주가 완도 출신이라면 양용은은 제주도에서 태어나 자랐다. 최경주가 PGA투어 데뷔 첫해에 부진해 퀄리파잉스쿨로 다시 돌아갔던 것처럼 양용은 역시 퀄리파잉스쿨을 두 번이나 치렀다. 일본 투어를 거쳐 미국 PGA투어에 진출했다는 점도 두 선수의 공통점이다. 자녀 수도 각각 3명으로 같다.

양용은은 고교 졸업을 앞둔 1991년 친구를 따라 골프 연습장에 갔다가 처음으로 골프 클럽을 잡았다. ‘투어 프로’라는 직업이 있는지도 몰랐던 시절이었다. 양용은은 낮에는 공을 줍고 밤에는 볼을 때렸다. 그러다 96년 프로테스트에 합격했다. 처음엔 탈락 통보를 받았지만 결원이 생겨 추가 모집에 합격했다는 일화는 잘 알려진 이야기다. 99년 신인왕을 차지했지만 상금액이 1800만원밖에 안 되자 투어 프로를 접고 돈을 벌기 위해 레슨에 뛰어들기도 했다.

“1800만원이 결코 적은 돈은 아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내가 1등을 했는데 1년 벌이가 1800만원밖에 안 된다는 사실이 나를 화나게 했다. 구두닦이를 해서 대한민국에서 1등을 해도 이보단 나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아내에게 줄 생활비도 없었다. 찬물에 밥을 말아 먹고 지냈다.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힘든 시기였다.”

2002년 국내 투어 첫 승을 거둔 그는 2004년엔 일본 투어에 진출해 데뷔 첫해에 2승을 거뒀다. 양용은은 이어 2006년 11월 유러피언 투어 HSBC챔피언스 대회에서 우승하면서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았다. 특히 6개 대회 연속 우승을 차지하면서 승승장구하던 타이거 우즈(미국)를 물리치고 우승해 그의 이름 앞에는 ‘타이거를 물리친 사나이’란 수식어가 붙기도 했다.

유럽 투어에서 상위권에 오른 성적을 바탕으로 2007년 PGA투어 9개 대회에 출전했지만 성적은 신통찮았다. 1년간 상금이 고작 5만3000달러에 그쳤다. 2007년 12월 퀄리파잉스쿨을 통해 다시 PGA투어의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PGA투어의 벽은 높기만 했다. 1년 동안 톱10 안에 든 것이 겨우 한 차례에 불과했다. 양용은은 결국 지옥의 라운드로 불리는 퀄리파잉스쿨을 다시 치른 끝에 ‘2전3기’에 성공했다. 그러고는 대기자 신분으로 출전한 혼다 클래식에서 우승하며 ‘인생 역전’의 홈런을 터뜨렸다. 양용은이 이날 받은 우승상금은 100만8000달러(약 16억원). 지난해 1년 동안 벌어들인 상금(46만 달러)의 배를 넘는 액수다.  

정제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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