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욱 대기자의 경제 패트롤] 은행법 개정안 처리 무산 또 한 편의 블랙 코미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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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모두들 경제가 어렵다고 한다. 앞으로 당분간은 더 나빠질 수밖에 없다고들 한다. 그런 어려움에서 하루빨리 벗어나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모든 노력을 빨리 과감하게 기울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 바탕으로 사회적 통합과 위기의 리더십의 중요성도 강조한다. 하지만 현실도 그럴까.

지난 3일 폐회한 임시국회에서 은행법 개정안 처리는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현행법상 4%로 묶여 있는 산업자본의 시중은행 소유지분 한도를 10%로 늘리자는 정부·여당 안에 대해 민주당은 8%를 내세웠고, 양당이 한때 9%로 합의점을 찾는 듯하더니 한나라당 내의 불협화음과, 다시 8%로 선회한 야당의 시간끌기 전략에 말려 결국 무산되는 일련의 과정은 이 나라 정치 경쟁력의 수준을 그대로 보여준 한 편의 블랙 코미디였다. 이른바 금산분리 완화는 국내 산업자본과 금융자본 간의 엄격한 칸막이가 역차별의 소지가 분명하고, 은행 자본 확충의 주요한 통로 하나를 차단-특히 요즘 같은 상황에서는-하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금융 경쟁력을 저해하는 요인이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그런 문제의식은 실종된 채 10%냐 8%냐, 누구의 숫자가 받아들여지느냐 하는 숫자노름과 기싸움으로 변질돼버렸다. 금산분리 완화만 나오면 은행이 소수 재벌의 사금고가 될 것이란 반론이 제기된다. 하지만 30대 그룹이 70조원 이상의 현금 유보를 갖고 있고, 부채비율은 100% 남짓까지 낮아지면서, 은행권 대출에서 대기업 비중이 갈수록 줄어온 추세에서 이러한 우려가 과연 타당한 것일까. 또 이 나라 금융 감독기관은 은행의 사금고화를 방지할 능력도 없는 청맹과니일까. 이건 한마디로 쓸데없는 자기현혹적 정치적 주문에 불과하다.

전에도 한번 언급한 적이 있지만 비정규직 문제는 위기 상황에서 가장 시급한 해결 과제다. 그럼에도 이와 관련 있는 모든 주체가 방관 자세다. 노동계는 여전히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이라는 비현실적 자기최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일의 질이 아니라 양이 먼저란 요즘의 취업 현실에서 눈을 돌리면 해법이 나올 수 없다. 사용자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비정규직 2년 기한이 만들어질 당시 3~4년 정도로 연장할 것을 주장하던 경총은 요즘 새로 제기되는 같은 논의에 내심 곤혹스러워하는 분위기다. 앞으로 실물경제에 밀어닥칠 파고를 생각할 때 외려 인력 운용에 부담이 되리라는 현실적 판단 때문이다. 처음엔 제법 의지를 보였던 정부도 한 발 물러나 있기는 마찬가지다. 노사 모두 탐탁지 않아 하는 일에 괜히 껴들어 뭐 좋은 일 있겠냐는 보신주의다. 그 틈새에서 비정규직만 피가 마른다. 이러니 과연 경제 위기의 심각성이나 사회적 통합의 필요성을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인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박태욱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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