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일의 Inside Pitch Plus <99>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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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호 16면

그는 여간해서는 먼저 감정을 드러내는 법이 없다. 말수도 적다. 상대가 말을 하지 않으면 자신도 입을 닫고 몇 시간이고 그냥 있는다. 한참 지나 입을 열어도 단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서울 사투리가 오히려 어눌하게 들리는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닌가 한다.

‘분통’마저 안고 가는 김인식의 배려 리더십

WBC 국가대표팀 김인식 감독 얘기다. 1991년 그는 쌍방울 레이더스 초대 감독이었다. 쌍방울은 첫 시즌을 2군에서 치렀다. 그리고 이듬해 정규리그 데뷔를 앞둔 겨울 그 비전을 듣기 위해 그를 찾아갔다. 그는 당시만 해도 생소했던 메이저리그 경기를 비디오로 보고 있었다. 간단한 인사를 나눈 뒤 함께 야구를 봤다. 대화는 그 비디오에 관한 얘기 몇 마디가 전부였다. 궁금한 게 많았지만 분위기가 아니었다. 한 시간이 넘게 그 비디오를 함께 보고 나서야 그는 ‘인사이드’가 궁금해하는 얘기를 들려줬다.

막상 얘기를 하기 시작하면 그는 다른 사람이 된다. 대사에 핵심이 있고 논리적이며 상대의 궁금한 점을 제대로 긁어 준다. 간결하지만 내용이 튼실하고, 요점을 놓치지 않는 대화가 된다. 그래서 대화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내 마음을 읽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그가 2006년 초대 WBC 감독을 맡았을 때다. 1라운드 일본전을 앞두고 선발 라인업이 이슈였다. 선발 포수(홍성흔 또는 조인성)와 우익수(이진영 또는 송지만)가 애매했다. 그 성향에 따라 대표팀의 전략을 알 수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경기 전날 호텔 로비에서 우연히 김 감독과 마주쳤다.

“감독님, 내일 한·일전 말이죠…”라고 묻는 ‘인사이드’에게 그는 알 듯 말듯한 웃음을 머금더니 “아무래도 조인성이 나가야 할 거 같아”라고 운을 뗐다. 거기서 “왜요?” 뭐 이런 식으로 가면 “왜 이래, 아마추어같이…”라고 여길 거 같아 일단 아는 척을 했다. 시간이 없었다. 그리고 감으로 때렸다. “우익수엔 이진영이 나가나요?” 그때 그의 대답은 또 한번 특유의 웃음, 그리고 시선의 맞춤으로 돌아왔다. ‘홍성흔-송지만’이면 공격, ‘조인성-이진영’이면 수비가 우선이라는 컨셉트였다. 그럼 한·일전은 수비를 먼저 챙긴다는 전략을 세웠다는 거였다.

이런 식이다. 그는 ‘배려’의 힘을 안다. 혹 그 대상이 경쟁 구도에 있더라도 그는 먼저 상대를 인정한다. 상대를 인정해 주는 건 스포츠의 기본정신, 페어플레이에 충실하겠다는 약속이다. 결과가 어찌될지언정 과정을 먼저 챙기겠다는 게 그의 소신이다.

“아직도 결정이 안 돼 아쉽지만 그는 클리블랜드 소속 선수이기 때문에 그 팀의 결정을 존중해 줘야 한다. 그게 맞을 거 같다”-추신수 출전 여부에 대해.

“WBC는 투수들이 완벽하지 않으면 손해를 볼 수 있다. 그래도 대회 규정이 그렇게 정해졌으면 따라야 한다”-대회 방식의 불합리를 지적하는 질문에.

지난 4일 기자회견에서 그가 한 말이다. 이처럼 김인식 감독은 이번 대회를 ‘분통’마저 안고 가는 배려의 리더십으로 시작했다. 그 역시 메이저리그(MLB)가 일방적인 권리를 휘두르고 있는 대회 방식에 불만이다. 그러나 그는 전사(戰士)다. ‘원칙’을 바꿔 주는 건 그의 몫이 아니라 한국야구위원회, KBO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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