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남산골 한옥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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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조선조 말기 박지원 (朴趾源) 이 지은 한문소설 '허생전 (許生傳)' 의 주인공은 이른바 '남산골 샌님' 의 전형이다.

이 소설은 첫머리에서 허생의 집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남산 밑에 닿으면 우물터 위에 해묵은 은행나무가 서 있고, 싸리문이 그 나무를 향해 열려 있으며, 초옥 두어 간이 바람을 가리지 못한 채 서 있었다. "

가난하지만 자존심만은 누구보다 강한 '남산골 샌님' 의 이미지에 딱 어울리는 집의 모습이다.

조선조 초기에는 한명회 (韓明澮)가 살았고, 중기까지만 해도 떵떵거리는 고관대작들이 살았던 남산골에 가난한 양반이나 과거에 실패한 생원 (生員) 들이 꾸역꾸역 몰려들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이후였다.

이들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 세상살이와 어려운 살림살이에도 꺾이지 않는 선비로서의 기백 (氣魄) 을 남산의 장엄한 기상 (氣像) 과 연결지으려 했던 것이다.

일본이 임진왜란부터 강점까지 민족정기의 말살정책을 줄곧 남산의 훼손으로 시작한 것은 당연했다.

임진왜란때 1천5백여명의 왜군이 주둔해 성 (城) 을 쌓았던 곳도, 갑신정변 이후 일본 공사관을 새로 지은 곳도, 을사보호조약 이후 통감부를 세운 곳도 남산이었다.

통감부 건물은 곧 총독부로 변신했고 부근에 총독관저와 정무총감 관저까지 들어서기에 이르렀다.

한데 어쩐 일인지 일제 (日帝) 억압통치의 상징인 통감부 자리에는 중앙정보부 (현 국가안전기획부)가, 고문과 악행을 일삼던 헌병대사령부 자리에는 수도경비사령부가 들어섰다.

더욱 딱한 일은 무분별한 개발정책으로 옛모습을 거의 잃게 됐다는 점이다.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 하여 93년부터 '남산 제모습찾기' 라는 인공적 치유책이 본격적으로 실시되기 시작했다.

수방사를 필두로 안기부.외인아파트 등 남산을 잠식해 온 대형 건물을 모두 철거하고 그 자리를 시민의 휴식.체육공간, 전통문화동네 등으로 조성한다는 계획이다.

옛 수방사 터에 조성되는 '남산골 한옥촌' 은 그 계획의 일환이다.

다섯채의 대표적인 전통 한옥을 옮겨와 재조립, 조상의 숨결이 느껴지는 주거생활박물관으로 운영하리라 한다.

관광.교육의 측면에서 쓰임새도 적지 않겠지만 아무래도 허생의 '남산골' 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경관 (景觀) 도 경관이지만 남산의 보이지 않는 기상을 복원 (復元) 하는데 신경을 써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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