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약 후 실제 기증이 관건…장기기증 열풍 지속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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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출혈로 뇌사 상태에 빠진 뒤 심장과 폐, 각막을 기증하고 세상을 떠난 권투 선수 故 최요삼, "죽어서 앞 못 보는 이들에게 세상의 빛을 전하고 싶다"며 각막을 기증한 故 김수환 추기경…. 유명인들의 장기 기증은 한동안 사회에 뜨거운 반향을 일으킨다. 김 추기경의 선종 직후 한 장기기증 단체에는 온라인 장기 기증 서약이 평소보다 20배 이상 늘고 문의전화도 200~300통 씩 빗발쳤다고 한다.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한 지 한 달이 다 돼가지만 장기 기증에 대한 열풍은 여전히 뜨겁다. 관건은 이런 열기가 얼마나 꾸준히 이어지느냐다. 장기 기증을 기다리는 환자들은 많지만 공급되는 장기는 늘 부족하고 이는 짧은 '열풍'만으로는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진출처=여성중앙]

◇24만명 사망에 각막기증자 88명뿐= 국립장기이식관리센터에 따르면 지난해까지 집계된 국내 각막이식 대기자는 약 3630명. 도처에 흩어져 등록되지 않은 인원까지 합치면 2만명에 육박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실제 이식 받는 이들은 매년 100여 명이 채 안된다고 한다.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에 따르면 지난 해 각막을 기증한 사람은 88명이다. 우리나라에서 매년 24만 명이 사망하는 통계치를 볼 때 48만 개의 각막 중 불과 176개만이 기증된 것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수많은 각막들은 어디로 갔을까. 대다수가 땅에 묻히거나 화장으로 불태워진 것이다.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 김혜라 간사는 "보통 한 사람이 사후에 두 개의 각막을 기증할 수 있으니 이들 중 1%만 기증을 해도 우리나라 각막 이식대기자 모두가 이식 수술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부족하기는 신장도 마찬가지다. 국립장기이식관리센터에 올해 1월까지 집계된 신장 이식 대기자 수는 총 7700여명. 이 가운데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를 통해 신장을 이식받은 이들은 870명 정도다. 다른 장기기증 단체 수치까지 합쳐도 전체 대기자 중 겨우 10% 정도 만이 이식을 받는 셈이다. 그만큼 장기 기증 수요는 많고 공급은 턱없이 부족하다.


◇ '사랑 바이러스' 얼마나 오래 갈까…서약 후 취소도 잇따라= 2007년 12월. 당시 故 최요삼 선수가 남긴 '사랑 바이러스'는 뜨거운 열풍을 일으켰다. 장기 기증 캠페인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늘고 온라인 서약이나 문의 전화도 잇따랐다.

시간이 지나면서 장기기증에 대한 관심은 조금씩 식는듯 했지만 최근 故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으로 장기 기증은 다시 뜨거운 화두가 되고 있다. 지난 달 19일 하루 동안에만 총 740여 명이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에 온라인 기증 서약을 했다. 하루 25~30명의 사람들이 온라인 서명 신청을 했던 평소에 비해 20배 이상 늘어난 수치다. 지금까지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에 총 35만 명이 온·오프라인으로 기증 서약을 했다.

반면 서약 후 마음이 바뀌어 취소하는 이들도 있다. 최근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 홈페이지에는 "혼자만의 생각으로 서약을 했는데 가족들이 반대한다. 취소해달라" "마음이 바뀌었다"는 글도 올라오고 있다.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 김혜라 간사는 "서약 후 취소 절차를 물어보시는 분들도 있는데 본인의 의사가 바뀌면 언제든지 취소할 수 있다"고 전했다. 그만큼 억지로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의지를 존중한다는 것이다.

공급이 부족한 데다 취소 사례도 적지 않은 것이 현실이지만 어쨌든 김 추기경 선종 후 최근 정부 부처 공무원이나 군인, 각종 회사들까지 기증에 앞장서고 있어 당분간 장기기증 열기는 꾸준히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보건복지가족부는 소속 공무원 1700여명의 장기기증 서약서를 천주교 '한마음한몸운동본부'에 전달했고, 외교통상부와 통일부 행정안전부 문화체육관광부 등 4개 부처도 4~6일 소속 공무원들 가운데 희망자를 대상으로 장기기증 서약을 받는다. 해병대도 창설 60주년을 맞아 장기기증 운동을 하기로 했으며 약 1000여 명이 서약한 것으로 알려졌다. 롯데홈쇼핑도 6일까지 장기기증을 위한 기부 방송을 하고 방송 매출액의 1%는 각막 기증을 위해 쓰기로 했다.

박진탁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장은 "많은 단체들이 장기기증에 큰 관심을 보내주고 있다"며 "생명 나눔의 열기가 꾸준히 이뤄지기를 기대한다"고 전했다.

글·사진=김진희 기자


인기 드라마·영화·소설 속 장기 이식 오류들

1. 안암환자가 각막이식을 한다? 드라마 ‘천국의 계단’

‘각막이식수술만 하면 앞을 볼 수 있다’는 오해를 심어준 드라마. 인기리에 방송됐던 SBS 드라마 ‘천국의 계단’에서 한태화(신현준)는 한정서(최지우)를 위해 자살을 하면서까지 각막을 기증한다. 정서는 시력을 되찾아 차송주(권상우)를 바라보지만 결국은 뇌까지 전이된 암으로 죽게 된다. 이 드라마의 결정적인 허구는 한정서가 앓았던 안암은 각막 이식으로는 시력 회복이 안 된다는 점이다. 의학적으로 전혀 맞지 않는 설정을 했다는 것이 가장 큰 오류다.

2. 이식받은 장기가 정신을 지배한다? 드라마 '여름향기'

각막 혼탁으로 인한 질환만이 각막 이식 수술로 시력을 되찾을 수 있지만 드라마 ‘여름 향기’는 이식된 장기에 대한 오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경우다. 선천성 심장병으로 인해 심장이식을 받은 혜원(손예진)은 생전 처음 보는 민우(송승헌)를 보고 가슴이 설렌다. 심장기증을 한 사람이 민우의 옛 여자친구였기 때문. 하지만 지금까지 이식된 장기로 인해 이 같은 영향이 있었다는 의학적인 보고는 없다. 드라마 속의 상상력은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이것을 현실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3. 장기 기증자를 내가 지정한다? 영화 ‘늑대의 유혹’

영화 '늑대의 유혹'에서도 각막기증에 대해 오해가 드러난다. 주인공 정태성(강동원)은 심장이 약해서 호주에서 치료를 받다가 죽는다. 이 때 그곳에서 알게 된 여자에게 각막을 기증하게 된다. 그러나 장기 기증은 가족이 아닌 경우 이식대상자를 지정할 수 없다. 즉 각막을 기증할 수는 있지만 그 각막을 누구에게 주겠다고 지정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4. 각막 이식 후 귀신을 본다? 영화 ‘The eye'

영화 'The eye'는 각막 이식을 받은 주인공이 수술 이후 귀신을 보게 된다는 설정 때문에 자칫 각막 이식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영화적 상상력을 두고 옳고 그름을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단지 영화와 현실은 차이가 있다는 점을 언급할 수 있을 뿐이다.

5. 스스로 약물을 투여해 뇌사 시 기증을 한다? 소설 ‘아버지’

소설 ‘아버지’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아버지의 비애를 가감 없이 보여줘 화제가 됐던 소설로 지금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소설이 더욱 슬펐던 것은 죽음이 가까운 가운데 장기기증 결심한 주인공 때문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장기기증의 관점에서 본다면 ‘아버지’는 오류투성이 소설이다. 주인공은 췌장암 말기 암환자로 장기기증을 결심한다. 그 방법은 약물을 투여해 심장마비를 선택하는 것. 하지만 안타깝게도 말기 암환자는 장기를 기증할 수 없다. 심장마비는 심장사이기 때문에 각막과 시신만 기증할 수 있다. 뇌사 시에만 간, 신장, 심장, 췌장, 폐장 등의 장기기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도움말=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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