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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티나이티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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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부기장 “저기, 뒤쪽에 얼음이 맺혀 있어요. 잠시 날개 상판을 살펴보죠.”-기장 “안 돼, 곧 이륙해야 돼.” -부기장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요.”-기장 “괜찮다니까.”-부기장 “음…, 괜찮을지도 모르죠.”-요란한 소음-부기장 “기장님, 추락하고 있어요.”-기장 “나도 알아!”

1982년 1월 13일, 워싱턴 내셔널 공항에서 막 이륙한 에어 플로리다 여객기가 꽁꽁 얼어붙은 포토맥강에 추락해 78명이 목숨을 잃는다. 블랙박스에 담긴 최후의 기록을 보면 부기장의 완곡한 문제 제기를 기장이 철저히 무시한 것이 사고 원인으로 드러난다. 미국 작가 맬컴 글래드웰은 신작 『아웃라이어』에서 수많은 항공기 사고가 조종실 내의 의사소통 문제 때문에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위계질서에 젖은 부기장들이 기장의 잘못된 판단에 맞서 제대로 직언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조종사들이 기장(captain)의 권위에 짓눌려 제 역할을 못하는 현상을 ‘캡티나이티스(captainitis)’라 한다. 비단 항공사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의 한 연구팀이 병원 간호사실 22곳에 전화를 건 뒤 의사를 사칭하고 무허가 약품을 특정 환자에게 주사하라는 지시를 내려봤다. 놀랍게도 21명이 아무 이의 없이 약품을 꺼내러 가는 게 아닌가. 의사들의 권위가 워낙 크다 보니 맹목적인 복종이 간호사들 몸에 밴 것이다. 심리학자 로버트 치알디니는 독불장군식 리더십이 캡티나이티스를 초래한다고 경계했다. 스포츠 팀 감독이든 기업 최고경영자(CEO)든 아랫사람의 의견을 기꺼이 들어야 치명적 실수를 막을 수 있다는 거다.

하지만 스스로 유능하다 믿는 리더일수록 “입 닥치고 나를 따르라”는 식인 경우가 많다.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밝혀낸 과학자 제임스 웟슨의 얘기가 교훈이 될 듯하다. 남보다 먼저 어려운 구조를 푼 비결을 묻자 그는 “제일 똑똑한 과학자가 아닌 덕분”이란 의외의 대답을 했다. “자기 판단력이 가장 뛰어나다고 믿는 사람은 절대 남의 조언을 구하지 않기 때문”이란다. 반면 ‘덜 똑똑한’ 웟슨은 다른 이들이 제시한 연구법도 과감히 수용한 결과 눈부신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얼마 전 취임 1주년을 맞은 이명박 대통령에게 “CEO형 리더십을 버리라”는 쓴소리가 쏟아졌다. 지시와 명령으로 일관해 온 국정 운영 스타일을 바꾸란 얘기다. 노엽더라도 귀담아듣기 바란다. 리더 혼자 내닫다간 비행기가 떨어지고 배가 뒤집힐 수 있으니 말이다.

신예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