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만발하는 문화축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대권다툼 진흙탕을 저만치 비켜두고 가을기운이 감돌자마자 우후죽순처럼 문화축제가 도처에서 만발하고 있다.

진창에 피는 연꽃처럼 아름다운 행사들이다.

서울국제음악제 (8월25일~9월11일) , 지구촌 미술축제라는 제2회 광주비엔날레 (9월1일~11월27일) , 세계무대예술향연인 세계연극제 97 서울.경기 (9월1일~10월15일) , 그리고 부천의 국제판타스틱영화제 (8월29일~9월5일)가 바로 그것이다.

이번 문화행사들에서 이목을 끄는 대목은 굵직한 국제적 예술제가 지방 대도시에서 개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대체로 큰 행사는 중앙정부 주관으로 서울에서, 작은 행사는 소도시 또는 그 이하 지방에서 열리기 일쑤였다.

국제적 공식명칭인 '88 서울올림픽' 은 명칭만 서울일뿐 국가가 주관했기 때문에 '한국올림픽' 이라 해야 마땅했고, 지방소도시에서 열리는 문화축제는 민속.전통문화가 잔존하고 있음을 확인하거나, 일본의 일촌일품 (一村一品) 운동처럼 인삼.굴비.감귤아가씨 선발대회같은 볼거리를 곁들인 지방특산물 판촉수준의, 파급범위를 아무리 넓게 잡아도 내수성 (內需性) 이 그 특징이었다.

그런 점에서 부산국제영화제에 이어 광주비엔날레, 그리고 부천영화제의 개최는 전례없는 움직임이 아닐 수 없다.

새로운 움직임에는 그럴만한 연유가 있다.

무엇보다 90년대 초에 재개된 지방자치제가 내실화의 실마리를 시대의 대세인 세계화 추세에서 찾았다는 점이다.

주로 경제분야의 세계화로 인해 무국경경제시대가 열리고 있고, 그만큼 중앙정부 또는 국가의 조절능력이 전보다 훨씬 약화되고 있음이 최근 추세다.

이런 상황에서 지방도시는 조절.지원능력을 점차 상실하고 있는 중앙정부에만 무작정 기댈 수 없는 지경에 봉착한다.

그래서 자치단체 가운데 어느 정도 자족성을 구비한 지방 대도시가 세계화의 물결에 직접 뛰어들어보겠다는 시도가 이처럼 국제적 예술제로 나타난 것이다.

지방대도시의 변신노력이 왜 하필이면 문화쪽일까. 이건 사람의 욕구 수준이 경제적 여유를 누리게 되면 그 다음엔 대체로 문화로 실현되는 삶의 보람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삶의 보람을 실감시켜주는 문화는 또한 지역적으로 시민들에게 정체성과 자긍심을 안겨다 준다.

작금의 세계적 추세는 도시정책가들이 문화가 발전의 과실이기도 하지만 묘하게 발전의 수단이 된다는 점에도 착안하고 있다는 것이다.

해당도시의 문화적 활력이 돈 잘번다 해서 '골든칼라 (golden collar)' 라 이름 붙여진 이들의 유치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도시정책가들은 도시를 아름답게 꾸미자는 '장소만들기 (place - making)' 란 순수동기에 그치지 않고, 다투어 수준급의 문화로 포장해 관광객이나 정보엘리트의 유치에 도움이 되도록 고객만족의 방향으로 도시를 차별화하고 상품화하는 '장소판촉 (place marketing)' 에 열심이다.

'경제의 세계화' 에 대응하는 '문화의 지방경제화' 전략인 것이다.

아무튼 세계도처에서 크고 작은 도시들이 장소판촉에 혈안이 돼 있다.

문화를 전략산업으로 여기고 이를 구체화하기 위해 공업단지처럼 문화단지를 계획하기도 한다.

낡은 도심을 문화단지로 재개발하면 대도시의 쇠퇴도 막을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부천이 영화제에 이어 영화단지를 만들겠다 하고, 서울이 세종로에서 예술의전당에 이르는 거리를 문화거리로 꾸미려는 발상도 이런 맥락에서다.

하나의 소도시로는 인구규모가 작아 문화를 전략산업으로 입지시키기 어려우면 이웃 소도시와 연대해 함께 문화벨트를 육성하는 전략도 구사하고 있다.

그러나 도시발전의 문화전략이 첨단 계책이긴 하나 만능책은 아니다.

무엇보다 장소판촉의 과실이 여유층에 한정된 채 저소득층에 제대로 확산된다는 보장이 없다.

광주비엔날레나 부천영화제가 외형적 성공만큼이나 결실을 보는 계절답게 지역주민들이 두루 혜택을 누리게 할지도 지켜봐야 할 일이다.

김형국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