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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티풀 보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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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이봐 친구, 굉장한 게 나왔어!”

2005년 봄 할리우드 각본가 J 마이클 스트랙진스키는 로스앤젤레스시청에 다니는 친구로부터 호들갑스러운 전화를 받았다. 시청 지하실의 옛 자료들을 태우다 사실이라곤 믿기지 않는 기록을 발견했단 거였다. ‘크리스틴 콜린스 사건’에 대한 시 청문회 자료였다. 1928년 3월, 싱글맘인 크리스틴의 아홉 살 난 아들 월터가 실종된다. 5개월 뒤 경찰은 기자들을 잔뜩 불러놓곤 엉뚱한 아이를 월터라며 떠안긴다. 크리스틴이 “내 아들이 아니다, 진짜를 찾아 달라”며 매달리자 정신병원에 가둬 버린다. 어렵게 빠져나온 크리스틴은 진짜 ‘미친 짓’을 시작한다. 시장과 경찰서장을 고발한 것이다. 월터가 살해됐을지 모른단 소식에도 그는 멈추지 않는다. 시민의 힘을 빌려, 무능과 부패의 상징이던 LA 경찰을 뿌리째 뒤엎는다. 스트랙진스키는 “이 노동자 계급 여성의 위대한 투쟁을 기리고자” 시나리오를 썼다. 영화 ‘체인질링’이다.

김종기(62)씨가 아들 대현이를 잃은 건 1995년 6월이었다. 열여섯 살 아들은 5층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삶을 끝냈다. 폭행·협박·강탈이 뒤범벅된 집단 괴롭힘 때문이었다. 학교는 진실을 외면했다. 다른 피해자 부모들은 사실을 숨기기 바빴다. 그는 깨달았다. ‘나도 대현이가 죽지 않았다면 저랬겠구나. 졸업만 하면 그만이다 쉬쉬했겠구나.’ 학교폭력이란 말조차 잘 쓰이지 않던 때였다. 그는 피해자 가족 최초로 이를 공론화했다. 생업(신원그룹 기획조정실장)을 포기하고 청소년폭력예방재단을 설립했다. 이후 재단은 우리나라 학교폭력 문제 해결의 구심이 됐다.

지난주 영국은 큰 슬픔에 잠겼다. 희귀병을 앓아 온 데이비드 캐머런 보수당수의 아들 아이번(6)이 숨진 것이다. 아이번은 월터와 대현이처럼 부모의 삶을 송두리째 바꿨다. ‘영국 1%’ 특권층인 캐머런 부부는 한밤중 아이를 업고 달려간 응급실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났다. 서민의 삶에 눈떴고, 보수인사들이 싫어하는 국민의료서비스(NHS)의 강력한 지지자가 됐다. 윌리엄 헤이그 보수당 의원의 말대로 아이번은 캐머런과 영국민 모두의 영원한 ‘뷰티풀 보이’가 됐다.

세 부모에게 애초 중요한 건 어디까지나 ‘내 새끼’였다. 그러다 알게 됐을 게다. 내 아이의 삶이 이웃 아이의 삶과 연결돼 있음을. 아무리 용을 써도 내 자식만 입시지옥으로부터, 유해식품으로부터, 폭력이 넘치는 세상으로부터 보호할 길은 없다. 이를 깨닫는 순간 세상 모든 뷰티풀 보이의 행복은 한 뼘 더 자라리라.

이나리 경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