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년 어린 첼리스트 장한나는 내 친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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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 집에서 평생 어루만져온 악기와 함께한 황병기 명인. 그는 칠순이 넘은 지금까지 서울 사대문 밖을 벗어나 살아본 적이 없다. 전화번호 뒷자리도 50여 년 동안 안 바꿨다. 단순하고 한결같은 삶이다. [중앙포토]

 가야금 연주자 황병기(73)씨는 1955년 경기고등학교 졸업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형식적인 행사에 참여할 필요를 못 느꼈기 때문”이라고 했다. 대신 훗날 아내가 된 한말숙(78·소설가)씨와 오붓한 데이트를 즐겼다. 이 졸업식에서 자신이 전국 국악경연대회에서 우승한 경력을 평가받아 특기상을 받았다는 사실도 나중에야 알았다고 한다. “졸업장 좀 찾아가라는 성화에 대학 입학 후에야 다시 고등학교에 들렀지.”

대학에 다니면서도 고등학교 교복에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몸에 익숙한 옷을 굳이 갈아입을 필요가 없다. 신발도 편한 게 제일이다”라는 이유에서였다. 황씨의 삶은 이처럼 간단하고 명료하며 실용적이다. 사람들이 “경기중·고와 서울대 법대를 나와 왜 국악을 하느냐”고 물으면 “한국 사람이 한국 음악을 하는 건 아주 평범한 일”이라고 정리한다. 그는 중학교 1학년 때 친구를 따라 우연히 고전무용 연구소에 들렀다가 가야금 소리를 들었고, ‘이건 꼭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60여 년 동안 가야금을 탔다. 정악(궁중과 양반의 음악)과 민속악(서민의 음악)을 아우르고, 작곡과 연주에서 동등하게 명성을 얻게 된 출발이 이처럼 단순했던 것이다.

명료하고 선 굵은 그의 삶이 최근 출간된 자서전 『오동 천년, 탄금 60년』에 실렸다. 지난해 본지에 88회 실렸던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의 내용을 손보고 늘린 것이다.

◆엉뚱한 낙제생이면서 촉수 세운 노력가=“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시작하는 개인사가 빼곡히 담겼다”는 것이 황병기씨의 설명이다. 간단한 상식으로 옳고 그름을 따지고, 맞다고 생각한 길을 걷는 것은 소년 황병기의 성격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 그는 공부할 필요를 못 느꼈다. 산으로 들로 놀러만 다녔다. 재동 국민학교(지금 초등학교)에서 시험만 봤다 하면 낙제생 대열에 끼였다. 빈 병으로 실험을 하는 물리 선생님에게 “병 속에 공기가 있는데도 비었다고 가정하는 것이 맞느냐”며 따져 묻는 학생이기도 했다.

하지만 확신이 생긴 일에는 최선을 다했다. 김윤덕·심상건 등 명인에게 음악 배우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서양음악, 영화음악, 전위예술에 이르기까지 교류의 폭을 넓히기 위해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1999년 대장암으로 수술을 받으면서도 작품을 썼다. 가장 한국적이면서 보편성을 지닌 음악을 위해 촉수를 세우며 살았다.

◆젊음이들이 국악 좋아하는 날까지=일흔이 넘은 현재의 삶도 명쾌하다. 내용의 변화를 위해서라면 형식도 과감히 바꾼다. 국립국악관현악단의 예술감독으로 일하는 그는 “젊은 사람들도 국악을 좋아하도록 하겠다”는 생각 아래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뮤직비디오처럼 펼쳐지는 공연(‘뛰다 튀다 타다’)을 기획하고, 어린이 교육을 위한 무대(‘엄마와 함께하는 국악보따리’)를 만들었다. 금기와 경계가 없는 이 공연들은 국악계에 새로운 개념을 던졌다. ‘국악보따리’는 유례없는 히트상품으로 기록됐다.

황씨 작품인 ‘미궁’을 틀어놓고 춤추는 비보이들을 보며 그는 감탄을 한다. “나도 비보이와 함께 공연해 보고 싶은데 이미 유행이 지나가지는 않았나?”하고 고민도 한다. 이처럼 한 곳에 갇히지 않고, 권위를 억지로 만들지도 않는 그가 46년 어린 첼리스트 장한나(27)씨를 “친구”라고 부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지난해 황병기와 한 무대에 섰던 장한나는 이번 책의 출간을 축하하며 ‘황병기-나의 친구, 나의 선생님’이라는 글을 정성스럽게 써서 보냈고, 황병기는 이 글을 책의 첫장에 실었다.

김호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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