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부미 넋 위로하던 비운의 궁궐문 사진 공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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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때 조선총독부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영혼을 위로하겠다며 만든 사당 박문(博文)사의 정문으로 사용된 경희궁 흥화문(興化門) 의 당시 사진이 박문사의 모습을 담은 사진과 함께 23일 공개 됐다. 사진 수집가인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이 공개한 1930년대 사진 4점 중 박문사 입구에 세워져 있는 큰 문(사진)에는 '경춘문(慶春門)' 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원래 이 문은 경희궁의 동쪽에 세워졌던 흥화문 이었지만 일제는 우리 민족을 욕 보이듯이 지금의 장춘단 공원 자리에 이 문을 옮겨 세우고 1932년 박문사를 완공했다.

일제 강점기 때 조선총독부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영혼을 위로하겠다며 만든 사당 박문(博文)사를 방문는 참배객들. 사진 수집가인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이 23일 공개했다.

일제 강점기 때 조선총독부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영혼을 위로하겠다며 만든 사당 박문(博文)사에서 일본인으로 보이는 2명의 감독자들이 잔디를 손질하는데 동원된 조선 부녀자들을 감독하고 있는 모습. 사진 수집가인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이 23일 공개했다.

일제 강점기 때 조선총독부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영혼을 위로하겠다며 만든 사당 박문(博文)사 전경. 사진 수집가인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이 23일 공개했다.

 경희궁 흥화문이 일제 강점기 때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영혼을 위로 하기 위해 일제가 만든 사당인 박문사(博文寺)의 정문으로 사용됐다는 사실을 아시는지. 경희궁 흥화문(興化門)의 일제 당시 사진이 삼일절을 6일 앞둔 23일에 공개됐다. 궁궐의 문이 침략자를 위한 사당의 출입구로 사용됐던 굴욕적인 사건 때문에 ‘비운의 문’으로 불리는 이 문과 함께 박문사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이다.

사진 수집가인 정성길(68)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이 공개한 1930년대 사진 4점 가운데 박문사 입구에 세워져 있는 큰 문(사진 1)에는 ‘경춘문(慶春門)’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일제 당시 박문사가 얼마나 위세를 떨쳤는 지는 건축물(사진4번)이나 참배객(사진2번)을 봐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또 다른 사진(3번)은 일본인으로 보이는 2명의 감독자들이 박문사의 잔디를 손질하기 위해 동원한 조선 부녀자들을 지시, 감독하고 있는 장면이다.

경춘문은 원래 경희궁의 동쪽에 세워졌던 흥화문이었지만 일제는 우리 민족을 욕보이듯이 지금의 장춘단 공원 자리에 이 문을 옮겨 세우고 1932년 박문사를 완공했다.

‘경춘문’이라는 명칭은 이토 히로부미의 호인 춘무(春畝)에서 따온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일제는 박문사가 들어선 언덕도 춘무(春畝)산으로 불렀다.

장춘단은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 때 전사한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 등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고종이 제단을 만들어 제사를 지냈던 곳이다. 일제는 1919년 이곳에 벚나무를 심어 공원을 만들고 제사를 금지했으며 결국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당한 이토 히로부미의 사당인 박문사까지 이곳에 지었다.

박문사는 대한민국 건국 이후 헐렸지만 흥화문은 신라호텔의 정문 등으로 사용되다가 1988년 경희궁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이미 일제에 의해 경희궁이 망가질 대로 망가지고 구세군 회관 등이 들어선 상태였다. 따라서 현재의 문은 원래 있던 자리는 아니다. 흥화문 옛터에는 표지석만 놓여있다.

당시 일제는 박문사를 건립하면서 흥화문 뿐만 아니라 숭례문에 연결된 서울 성곽이나 광화문의 석재 등 여러 문화재급 건축물에서 건축자재를 빼가 대거 사용했다.

정성길 관장은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박문사나 경춘문의 의미를 되새겨 볼때 지금 시대에서는 경춘문의 경은 경사 경(慶) 대신에 서울 경(京) 정도로 쓰고 박문사의 사도 절 사(寺) 대신에 제사 사(祀)를 써야 한다”고 말했다.

디지털뉴스 jdn@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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