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혁명].6 미국의 문화 자존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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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한국과 같은 후발국의 입장에서 가장 큰 문제는 투자를 하고 기술을 획득하면 어느 정도 따라 갈 수 있는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와 달리 콘텐츠는 '문화' 의 대중적인 영향력 없이는 세계시장을 파고 들기는 커녕 자국 시장도 지키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일본 소니의 미국 콘텐츠 시장 진출 과정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소니가 할리우드의 콜럼비아영화사를 35억 달러에 인수한 지난 89년 이후 2~3년간 소니의 할리우드 진출은 일본과 미국 양쪽 모두에 큰 걱정거리였다.

소니로서는 좀체로 이익이 나질 않는다는 것이었고 미국 쪽에서는 "일본의 경제력이 이제 미국 영화의 콘텐츠마저 바꾸어놓게 됐다" 는 것이었다.

그러나 올들어 양쪽 모두의 걱정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올 여름 미국시장에서 빅 히트를 치고 있는 액션영화 '대통령 전용기' (Air Force One)가 그같은 상황을 대표적으로 말해준다.

이 영화는 그야말로 '미국적' 이다.

'람보 대통령' 인 주인공이 대통령 전용기를 납치한 테러리스트들을 혼자서 모두 처치한다는 이야기다.

이 영화를 보려고 몰려드는 미국인 관객들에게는 요즘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 장기호황을 구가하고 있는 미국에 대한 우월감을 팝콘처럼 잔뜩 부풀려주는 영화다.

개봉 1주일 만의 흥행수입은 3천7백만달러. 이런 추세라면 올 봄의 또 다른 히트작 '맨 인 블랙' 의 흥행수입 2억달러를 크게 넘어설 전망이다.

그러나 많은 미국인들은 소니가 만든 '대통령 전용기' 를 보고는 이제 더 이상 '일본의 콘텐츠 침략' 을 걱정하지 않게 되었다.

예일의 경영대학장 제프리 갈튼은 최근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은 항상 외국의 영향력에 대해 지나친 걱정을 하곤 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세계 도처에 넘쳐나는 것은 미국 문화다" 라고 말했다.

콘텐츠를 소유하거나 확보하는 것도 어렵지만 콘텐츠를 바꾸거나 새로 만들어내기란 그보다 훨씬 어렵다는 이야기다.

이런 면에서 미국은 명실공히 세계 콘텐츠 시장의 왕국이라 할 만하다.

인터넷상의 콘텐츠를 통한 표현의 자유가 침해받아서는 안된다는 콘텐츠 왕국 미국, 자국 콘텐츠로 세계 시장을 석권하기 힘들다면 자본 진출을 통한 콘텐츠 사냥에 나서면 된다는 일본. 소니가 만든 미국 영화 '대통령 전용기' 를 보면서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워싱턴 = 김수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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