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숭례문이 두려워 해코지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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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일제 강점기 때 조선 총독부는 남산에 ‘조선신사(朝鮮神社)’를 세우고 참배를 강요했다. 총독부는 신사 참배를 조선 왕조 600년의 상징인 숭례문에서 시작하게 했다. 숭례문 옆에 ‘조선신궁참도(朝鮮神宮參道)’(사진下참조)를 알리는 석탑을 세운 것이다. 숭례문의 위용과 역사적 의의를 평가절하하기 위한 의도로 풀이된다. 그래서 숭례문 앞에서 찍은 사진조차 ‘조선신궁 참배기념’이 돼 버렸다(사진上).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은 기념사진을 찍은 이들이 일본에 유학 중인 조선 학생들이라고 설명했다.


숭례문에 대한 국민적 관심사가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정성길(67)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의 마음은 편치 않다. 그는 우리의 근현대사 희귀 사진 자료를 전문적으로 수집해 온 인물이다.

정 관장은 “화마(火魔)가 앗아가기 훨씬 이전부터 일본인들은 숭례문의 정신을 빼앗아갔다”고 말한다. 숭례문 수난의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외형만을 복원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는 주장이다. 그가 본지에 제공한 일련의 사진들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능욕 당한 숭례문의 역사를 말없이 증언한다.

1907년 대한제국 순종 황제의 즉위를 축하한답시고 조선을 찾은 일본 황족 때문에 숭례문은 오른쪽 날개를 잃었다. 일본 황족이 숭례문에 예(禮)를 갖출 수 없다는 이유로 우측 성곽을 헐어 따로 길을 낸 것이다. 친일단체인 일진회는 일장기를 내걸며 침략자를 맞았다.

정 관장은 “일본인들은 조선왕조 600년의 상징인 숭례문을 싫어했지만 한편으로 두려워했다”고 말한다. 그가 발굴한 숭례문 옆 ‘조선신궁참배참도(朝鮮神宮參道)’라고 쓴 석탑 사진이 그 증거다. 조선 총독부가 숭례문 옆에 신사 참배를 위한 석탑을 세운 일은 전문가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다. 정 관장은 “일본인들은 숭례문의 위상을 깎아 내리기 위해 남산에 그들의 종교인 신사를 짓고, 숭례문에서부터 시작하는 ‘참배로’를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1907년에 촬영한 사진. 당시 조선을 방문한 일본 황태자를 환영한다며 친일단체 일진회가 아치를 세웠다. 일본 황족이 조선의 상징물에 고개를 숙일 수 없다는 이유로 당시 숭례문의 오른쪽 성곽을 허물었다.

1920년대 초반에 촬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성곽은 완전 철거되고 숭례문 주변에 조경 사업까지 마친 상태지만 전차 선로는 보이지 않는다. 왼쪽 상단의 원표시는 명동성당 전경이다.

배노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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