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행의 옴부즈맨칼럼] 신문장점 못살린 휴먼스토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대한항공기의 대형사고를 보면서 새삼스럽게 장자 (莊子) 의 방생방사 (方生方死) 방사방생 (方死方生) 이란 말이 생각난다.

이 말의 뜻은 삶이 있기에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기에 삶이 있다는 것인데, 얼핏 보기에 관조적 (觀照的) 인듯 싶지만 죽음의 참뜻과 삶의 참길을 깨우쳐 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물론 이런 말이나 사고 (思考) 는 자칫 로고스와 파토스가 교착 (交錯) 하는, 불가해 (不可解) 한 혼돈 (混沌) 속으로 빠져들게 할 염려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큰 사건과 많은 주검 앞에선 삶과 죽음이 무엇인지 절로 그 참뜻을 생각하게 된다.

죽음이란 그것을 삶과의 영원한 단절 (斷切) 로 생각할 때 산 사람에겐 말할 수 없는 공포 (恐怖) 고,가눌 수 없는 비애 (悲哀) 다.

설령 삶과 죽음을 별개 (別個) 의 것으로 생각하더라도 그것은 불안으로 점철되게 마련이다.

공포와 비애는 종교와 이어지고, 불안은 철학을 낳는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산 사람의 몫일 뿐이다.

죽음에는 체험 (體驗) 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어떤 지식 (知識) 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상상력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삶과 죽음을 가르는 상황이란 그것이 어떤 상황의 것이든간에 산 사람에게 있어서나 죽은 이에게 있어 엄청난 무게를 갖는 것이고, 적어도 그런 무게를 산 사람의 처지에서 어떻게 감당하느냐에 따라 위대한 작품도 나오고, 그런 범주에서의 감동적인 글이나 기사도 나오게 마련인 것이다.

이른바 휴먼 스토리가 큰 사건의 커버기사로 중시되는 것도 이에서 예외가 아님은 물론이다.

적어도 이번 대한항공기의 괌 참변과 관련한 직접적인 현장 주변의 휴먼 스토리는 일차적으로 생존자 홍현성 (洪賢成) 씨와 구티에레스 괌지사의 이야기가 핵심이라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고 해서 사고현장의 처절한 상황이나 목소리, 그리고 구조활동에 얽힌 이야기들이 가볍게 다뤄져야 했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내가 그런 휴먼 스토리를 특별히 강조하는 까닭은 신문으로서 사건 커버의 장점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신문과 경쟁관계 내지 보완관계에 있다고 일컬어지고 있는 전파미디어, 특히 TV의 장점이 동시성 (同時性) 과 속보성 (速報性) , 그리고 생동감 (生動感) 으로 표출된다는 것은 구태여 설명할 나위도 없을줄 믿는다.

이에 대응하는 신문의 자세는 마땅히 구체성 (具體性) 과 분석적 (分析的) 인 것이 돼야 하고, 그에 곁들인 휴먼 스토리만 하더라도 머리와 마음을 함께 적셔주는 것이 돼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같다.

한데 휴먼 스토리에 있어서조차 신문의 커버가 방송의 그것에 미치지 못했다고 비판받는 상황은 신문이 스스로의 장점을 충분히 살리지 못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비단 휴먼 스토리에서 뿐만 아니라 사건의 현장취재에 있어서조차 신문기자가 지켜야 할 기본수칙이 제대로 지켜졌는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사건현장에 있어 중요한 것은 사고를 당한 당사자와 목격자, 그리고 현장의 사진과 그림, 그에 이은 원인분석 등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신문기자에게 있어 업무의 기본에 속하는 일이다.

이번 사고는 비록 국내가 아닌 해외에서 일어난 것이라 할지라도 그런 기본수칙에 어김이 있어야 할 이유는 조금도 없는 것이다.

특히 이번 같은 항공기사고는 생존자가 한 사람이 아닌 여러 사람인 경우 한 사람의 목소리만 들어서는 올바른 기사 커버라고 평가받기 어렵다.

순간적인 사고란 당사자의 느낌만으로는 진실을 설명할 수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생존자 복수의 목소리를 실어야 한다는 것은 하나의 기본적인 상식인 셈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나라 언론은 이런 기본적인 것조차 제대로 커버하지 않거나 못했다고 지적되고 있는 형편이다.

물론 이번 항공기 추락사고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원인과 처리 방향, 그리고 그와 연관된 기사들이 계속 이어질 터이다.

그러나 사고발생 첫날의 신문을 보면 그것이 바로 그 신문의 모습이요, 실력임을 절감하게 된다.

사실 큰 사고나 사건은 예고되지 않고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관계당국의 위기대처 능력을 시험하는 것이라고 흔히 일컬어진다.

그러나 신문의 입장에서도 갑작스런 사건이나 사고는 그 신문의 위기 대처능력 뿐만 아니라 신문의 참모습과 실력을 고스란히 노출시키게 마련이다.

이번 대한항공기 추락사고는 바로 그런 노출의 필요충분조건이 그대로 충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신문은 이른바 '제일보 (第一報)' , 즉 속보성에 있어서는 방송에 뒤질 수 있지만 그밖의 것에선 뒤져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독자의 심금을 울리는 휴먼 스토리는 방송이 재생 (再生) 할 수 없고, 설혹 재생한다 하더라도 거기엔 많은 시간이 걸리는 법이다.

이번 사고는 그 발생이나 대처에서 우리 사회 전반의 어떤 문제를 느끼게도 하지만 기사의 가치로 볼 때 '삶' 과 '죽음' 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특히 '죽음' 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신문의 질과 위상이 평가받는 외국 유력신문의 경우가 머리에 떠오른다.

이규행 본사 고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