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 민요 기행]1. 중국 동북 3성 조선족 마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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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민요의 서정과 가락을 현대시에 접목시켜 민중적 서정시 세계를 일구고 있는 중진시인 신경림 (62) 씨. 노트와 녹음기를 메고 80년대 내내 들녁과 산골, 섬마을에서 불리고 있는 민요를 찾아 전국을 떠돌았던 신씨가 이제 중국 조선족 민요를 찾아나섰다.

현대 물질문명과 개인주의에 덜 물든 그쪽 동포들이 우리보다 더많은 민요를 간직하고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과 함께. 또 일하며 놀며 함께 부르는 민요를 통해 민족의 동질성.정체성을 확인하려 중국 동북 3성 조선족 마을 곳곳을 취재하고 돌아왔다.

편집자

내가 중국에 사는 조선족의 민요를 찾아보고 싶다는 말을 했을 때 주위에서는 모두 회의적이었다.

한국에서도 이미 찾기 어렵게 된 민요를 외국, 그것도 50년 사회주의 체제 아래 살아온 동포 사이에서 어떻게 찾겠느냐는 것이었다.

우리말을 잊지 않고 있는 것만도 용한 일이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여러 경로를 통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릇 만물은 고향을 떠나면 오히려 제모습을 보존하려는 강한 힘을 갖는 법이다.

나는 에센스 프로덕션의 박상호PD와 함께 준비를 하고서, 먼저 박PD가 예비 답사를 한 다음 함께 22일동안 랴오닝성 (遼寧省) 의 하르빈과 신빈현 (新濱縣) , 옌볜 (延邊) 조선족 자치주, 헤이룽장성 (黑龍江省) 의 20개 자치향 (自治鄕) 중 신안진 (新安鎭) 등 7~8개 자치향을 순방했다.

그 결과 나는 비록 한국에 전혀 없는 새로운 민요거나 듣지 못하게 된 민요는 아니더라도, 민요가 조선족 사이에 기대했던 만큼은 남아 있음을 확인했다.

특히 도시에서 만난 젊은이나 학생들도 한두 마디는 으레 민요를 알고 있었는데, 이는 조선족의 음악교육이 민요를 중시한다는 증좌였다.

예컨대 옌볜대학 예술학원 (중학교 과정)에는 남도민요와 서도민요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따로 있었으며, 소학교 교과서에는 상대적으로 한국의 그것에보다 많은 민요가 실려 있었다.

이렇게 민요가 중시된데는 조선족 자치주 운동의 선구자요 옌볜 자치주 성립이후 그 주장 (州長) 을 지낸 주더하이 (朱德海.1911~72) 의 공이 컸다.

그는 전통문화를 보존 발굴하는 일을 소방사가 불을 끄는 급한 마음으로 하지 않아서는 조선의 정신과 문화는 대륙에서 사라지고 말 것이라면서 전통 음악.민요.민화등을 새로운 문화의 중심에 놓으려 애썼던 것이다.

물론 조선족 사회에서도 민요가 생활풍습과 함께 더 많이 남아 있는 곳은 농촌이다.

어떤 마을에 가면 60, 70대 노인뿐 아니라 40, 50대의 장년들도 할아버지 또는 아버지로부터 들어 배운 민요들을 몇 마디씩은 다 했다.

50년의 사회주의 체제와 외국이라는 조건도 이들의 문화에 본질적인 영향은 주지 못한 것 같았다.

가령 차로 옌지 (延吉)에서 두시간쯤 걸리는 안투 (安圖)에서, 다시 비포장도로를 30분쯤 가면 있는 산간 마을 안투현 창싱향 (長興鄕) 신툰 (新屯 - 새마을) 이 그 대표적인 예다.

1938년 선만척식 (鮮滿拓殖) 회사라는 일본의 만주 개척회사의 주선으로 경남 합천 가회면과 적죽면에서 60세대가 함께 이주해 와 그 절반이 아직 살고 있는데, 이제 늘어나 70여세대가 되었다.

이들이 처음 들어와 토굴같은 집을 짓고 자리잡은 곳은 도안과 수동이라는 산골짜기. 당국은 마을 둘레에 성을 쌓고 마을 사람들로 하여금 번갈아 번 (番) 을 서서 스스로 출입을 통제하게 했다.

비적 (匪賊) 의 침입을 막는다는 핑계였지만 실은 속출하는 야반도주자들을 막기 위해서였다.

이들은 회사에서 좁쌀을 빚내어 얻어다 먹으며 잡목으로 덮인 들판을 개간하여 논으로 만들고 수로를 내어 물을 끌어대었다.

이렇게 하여 농사를 지어 놓으면 회사에서 다 빚으로 거두어 가고, 당장 그달부터 다시 좁쌀을 빚내어 먹어야 했다.

이러느라 그들은 장사를 하거나 채마 농사를 지으며 이웃에 드문드문 사는 현지의 한인 (漢人) 과는 거의 상관할 일도 틈도 없었다.

한인과 담판할 일이 생기거나 관에 일이 있으면 마을 대표가 나가 보면 되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주민은 외부와는 완전히 단절된 상태로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무살 때 갓 시집온 새색시로 시부모와 함께 이주해 왔다는 김아기 (79) 할머니는 혁명의 승리로 토지를 분배받아 지금의 마을로 이사오기까지 거의 한인을 가까이서 본 일이 없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한어 (漢語 - 중국어) 는 한 마디도 못한다.

그 세대는 말할 것도 없고 여기서 나서 여기서 자란 40, 50대의 아낙네 가운데도 한어를 아는 사람이 드물다.

여자뿐 아니라 남자들도 나이 많은 사람들은 거의 한어를 모른다.

중국 땅 안에서도 철저하게 조선사람끼리 조선식으로 살았다는 얘기가 된다.

과연 이들은 정초 (正初) 면 지신밟기.성주풀이.샘굿을 하고, 달집을 태우고 줄다리기를 하고, 단오면 그네를 뛰고, 백중에는 씨름을 하고, 복중에는 복달임으로 개를 잡았다.

농사는 두레로 함께 짓고 결혼식과 장례식도 전통식으로 올렸다.

이런 풍습은 10년전까지도 고스란히 이어져 내려왔는데, 아직도 동네에 경사 (慶事)가 있거나 명절 때면 풍물을 논다.

악기를 다룰 줄 아는 몇 사람만이 하는 풍물이 아니고 동네 사람 전부가 춤을 추며 뒤따름으로써 참여하는 풍물이다.

특히 소리를 잘해 모를 낼 때 부르는 소리와 산에 가 나무할 때하는 소리가 따로 있고, 옛날에는 길쌈할 때도 소리를 했었는데, 노인들은 지금도 모이면 이 소리들을 한다.

말하자면 이들은 벼농사와 함께 벼농사 문화도 가지고 이민해 온 터였다.

"일이 힘들기만 하고 놀거리가 없을 때 마침 조선총독부 조선인 관리가 우리 사는 꼴을 보러 왔단 말야. 우리 모양이 하도 딱하니까 그 사람이 뭐 원하는 거 있으면 말하라는 거야. 그래서 풍물하고 사모관대하고 향도를 보내 달라고 했지. 놀거리도 마련하고 결혼과 장례를 제대로 하고 싶어서 말야. 그걸 그 사람이 보내주어 지금까지 그걸로 놀고 결혼하고 장사 지내는 기라. 중국 풍습은 배울 틈도 없었지." 찾아간 우리를 현관을 겸한 부엌을 끼고 칸막이가 없는 큰 방 두개가 역 (逆) 기역자로 앉은 촌장 (村長) 집에 들어 앉히고, 마을의 원로격인 이교영 (73) 노인은 이렇게 마을 얘기를 한 다음, 1939년 어린 나이로 함께 부모를 따라 들어와 평생을 이웃해 살았다는 강영훈 (74) 노인에게 받으라면서 소리를 뽑았다.

합천.밀양에서 흔히 들을 수 있던 메나리였다.

"물꼬야 철철 물 열어 놓고 쥔네 양반 어데 갔노 무네 점복 오레 들고 첩우 방에 놀로 갔네" 합천.밀양지방에서 똑같은 모내기 소리를 들은 일이 있다는 내 말에 이 노인은, 89년 초청을 받고 고향에 간 일이 있었는데 마침 모내기철이어서 한 마디 뽑았더니 아무도 따라 하는 사람이 없더라는 일화를 들려 주었다.

집안 조카들한테 상여소리도 가르쳐 주고 왔다고 했다.

한편 평생을 중국에서 산 강노인은 한어를 하느냐니까 한 마디도 못한다고 도리질을 치고는 자기뿐 아니라 다들 못한다고 덧붙였다.

손님을 대접한다고 동네에서는 뒤늦게 중소를 한 마리 잡았다.

그것을 기화로 동네가 한판 놀면서 그동안 해온 놀이를 보여 주겠다는 계획이었다.

놀이는 오후4시에 노인회관 마당에서 풍물로부터 시작되었다.

상쇠인 꽹과리가 앞장을 서고 북과 장구 그리고 여러개의 버꾸 (자루가 달린 작은 북)가 뒤를 서고, 40~50명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춤을 추며 뒤를 따르고, 다시 그 뒤를 장삼에 탈을 쓴 젊은 아낙네 넷이 굽 높은 구두를 신은 채 탈춤을 추며 따르면, 그 가운데서 열두발 상모가 돌아갔다.

마당 안과 밖을 가득 메우고 젊은이들.아이들도 신명을 내고, 마차를 타고 지나가던 한인들이 마차를 세우고서 부러운 듯 구경을 했다.

풍물이 끝나자 이노인이 7~8명의 할머니들과 함께 모내기 소리를 했다.

이노인이 메기고 할머니들이 더듬거리고 꿰맞추면서 받았는데, 제대로 기억하고 있지 못함을 민망해 하면서도 스무 대목은 이어갔다.

그 다음 동서로 편을 갈라 줄다리기를 하고, 달이 뜨자 달집을 태웠다.

보름달이 아닌 초생달이어서 유감이었지만, 마을 사람들은 젊은이 늙은이 가리지 않고 "불났다 불났다/까마귀야 너 집에/불났다 불꺼라" 하며 참여하는 것이 전혀 장난같지 않았다.

줄다리기와 달집 태우기는 풍년을 기원하는 놀이로 10년전까지만 해도 해마다 거르지 않고 해왔다.

풍년을 기원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지만, 실은 이것 말고는 따로 놀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었으리라. 밤늦어서는 촌장집에서 김성률 (44) , 이윤철 (33) 등 젊은이들과 그들의 아낙네들만 남아 술판을 벌이는데 그들의 입에서도 '돈돈날이' '밀양 아리랑' '양산도' 가 자연스럽게 나왔다.

특히 '돈돈날이' 가 나오자 젊은 아낙네들은 부리나케 우리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이 무도곡에 맞추어 사교춤을 추자는 소리였는데, 내 상대가 된 아낙네는 내가 자꾸 발을 밟자 "남조선 사람들은 춤도 못추고 무슨 재미로 살았슨가" 하고 웃었다.

그 자리에 취해 쓰러져 자고, 이튿날 떠나기 위해 마을밖으로 나오니 벼가 검푸르게 자란 동네 앞 논에서 한떼의 일꾼들이 "머리 좋고 날쌘 처재 올뽕낭게 앉아 우네" 하고 메기고 받으면서 논을 매고 있었다.

( '신경림의 조선족 민요기행' 1.2부는 9월16일 오전11시 케이블 Q채널을 통해 방영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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