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박이들이 쓴 ‘시골마을 자서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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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16살때 아무것도 모르고 시집왔어.아부지가 가라고 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온 거지.눈이 아주 펄펄 와 버스타고 진안읍에서 내리니까 가마꾼들이 기다리고 있더만.진안서 여꺼정 가마타고 와서 문 열어 주는 신랑 손 한번 보고,첫날밤에서야 얼굴을 봤네.’

진안군 진안군 부귀면 황금리 방곡마을은 버스가 하루 세번 밖에 들어오지 않는 두메산골.이 마을의 최 연장자인 올해 아흔살의 양수복 할머니는 74년전 꽃가마 타고 시집오던날의 기억을 마치 어제밤의 일처럼 생생하게 풀어놨다.

방곡마을의 토박이 주민들이 전국에서 처음으로 마을 자서전을 펴냈다. [공공작업소 ‘심심’ 제공]


이 마을에 터를 잡고 수십년간 살아 온 토박이 주민들이 최근 『방곡에 살다』는 책을 펴냈다.전국에서 처음으로 출간된 마을 자서전이다.20여명의 방곡리 주민들이 가슴깊이 간직해 온 유년시절의 추억과 결혼,자식농사 등에 얽힌 얘기와 동네의 대소사 등을 미주알 고주알 자세히 담았다.

양규진(75) 할아버지는 6.25때의 무서운 기억을 더듬었다.‘빨치산이 쳐들어 와 마을이 약탈당하고 불에 타 버렸지.주민 3명이 죽고 1년간 동네에 접근을 못했어.아랫동네에 피난해 있던 마을 사람들은 자비로 총을 사고 치안대를 조직해 빨치산을 몰아냈지.열곱살 어린나이,총부리를 겨누며 무섭기도 했지만 나와 내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더 컸어.’

유순애(66)할머니는 어머니(90),동네 최고의 미녀로 인정받는 손녀딸(5) 등 3대의 세여자가 한집에 모여 사는 내력을 이야기 했다.박덕례(69)할머니는 5년전 세상을 떠난 남편의 이름이 적힌 문패를 아직도 걸어놓고 혼자서 벼농사,인삼농사,고추농사,깨농사를 짓는 사연을 털어놨다.

이 책은 동네 간사를 맡고 있는 조헌철씨가 지난해부터 팔을 걷어 붙이고 나서 노력한 결실이다.“농촌이 급속히 고령화돼 가고 있쟎아요.지금 기록해 놓지 않으면 동네 역사가 사라져 버릴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죠.” 녹취와 글로 옮기는 작업은 농촌 전통테마 마을 만들기 사업을 진행하는 공공작업소 ‘심심’이 맡았다.

작업은 지난해 9월부터 3달간 진행했다.일년중 가장 바쁜때라 논으로 밭으로 주민들을 따라 다니며 함께 깨를 털고 고추를 말리면서 얘기를 들었다.

최정웅(69)이장은“아들이나 손자들이 책을 들춰보고 ‘우리 아버지·할아버지는 이렇게 사셨구나’하고 알수있게 돼 의미가 깊다”며 “지금처럼 동네 사람들끼리 서로 사랑하고 아끼며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장대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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