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노재현 시시각각

그물을 짜는 사람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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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한 사람이 걸어간다/몹시 가난한 사람인가보다/겨울 추위에도 입을 옷이 없어/넝마 위에 푸대 종이를 걸쳐 입었다//무엇을 담았던 푸대였을까/푸대 종이 걸친 등짝에 이런 글자가 인쇄/되어 있다/’이 물건은 연약하니/함부로 취급하지 마십시오’….

사회적 최(最)약자의 실종은 그야말로 극단적인 경우다. 이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버금가는 사연들이 우리 사회에 널려 있다. 혹독한 불황의 터널에 들어선 올해는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게다가 전 지구적인 불황이다. ‘연약함’ ‘취급주의’ ‘fragile(깨지기 쉬운)’ 같은 표지가 달걀이나 유리그릇 포장 말고 사람에게도 필요한 때가 왔다.

 ‘가난 구제는 나라도 못한다’는 속담은 적어도 올해만큼은 폐기돼야 한다. 사적인 모임에 나가보면 장사가 안 되느니, 대출이 막혔느니, 감원 대상에 올랐느니, 온통 어두운 얘기뿐이다. 형편이 훨씬 어려운 취약 계층은 어떻겠는가. 그래서 정부도 사회안전망 구축에 대대적으로 나섰을 것이다. 하지만 가난 구제에 나라의 역할이 가장 크다 해도 완벽하기는 어렵다. 한계가 있다. 그래서 나라에만 맡길 게 아니라 개인들도 나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안전망을 짜는 데 노끈 한 줄, 그물코 하나 더 보태는 개인들이 이미 적지 않은데 새삼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내일 열리는 한 ‘아름다운 결혼식’ 소식에 감동을 받아서다.

안태복(57)씨는 서울 을지로3가 인쇄골목에서 책자·홍보물·달력을 만드는 작은 업체의 주인이다. 그는 10년 넘게 국내 소녀가장 네 명과 독거노인 한 명에게 월 10만원씩 보내주고 있다. 소녀가장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다른 소녀를 찾아내 지원한다. 국제구호단체 월드비전을 통해 몽골·방글라데시 등의 어린이 5명에게도 매달 2만원씩 송금한다. 최근 딸(28)의 혼사가 코앞에 닥치자 안씨는 결혼의 의미를 더 깊게 새겨 주고 싶어졌다. 월드비전과 상의했다. “아프리카에서는 오염된 물을 먹고 중병에 걸리거나, 먼 데 가서 물을 길어오다 도중에 강간당하는 소녀들이 매우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우물을 파 주기로 결심했다. 딸도 흔쾌히 동의했다. 그는 내일 오후 서울 강남에서 열리는 결혼식의 신부 측 축의금을 5000만원으로 잡고, 만일 돈이 모자라면 자신이 보태 전액 기부하기로 약속했다. 축의금은 아프리카 가나 크라치웨스트 지역에 우물 13개를 뚫는 데 쓰일 예정이다.

 ‘나눔 바이러스’는 전염된다. 나는 이 바이러스가 온 나라에 창궐하고도 남아 해외에까지 번지길 희망한다. 한동대 4학년 김대현(28)씨는 중·고교 6년간 독지가의 후원을 받았다. 대학생이 된 후 과거의 자신과 같은 처지의 학생을 돕기로 결심했다. 매달 과외 아르바이트로 번 돈 중 3만원을 대전의 중학교 2학년 남학생에게 보내고 있다. 충북 청주 교외에서 유기농 신선초·케일을 재배하는 송재혁(54)씨는 가난하던 어린 시절 이웃집에서 외국 후원자가 보낸 염소를 받는 모습을 보고 부러워했던 기억을 갖고 있다. 그는 자신이 정기적으로 후원하는 모잠비크 어린이에게 벌써 염소 두 마리를 별도로 보냈다.

똑같은 노끈을 갖고도 남 해치는 올가미를 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건져 내는 그물을 짜는 사람이 있다. 나는 올가미 아닌 그물을 짜는 이가 우리 사회에 더 많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기쁘고 고맙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