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에메랄드 궁전의 추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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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오전 열시경, 나는 꽃배달 전문점에 전화를 걸어 서른 세 송이의 붉은 장미를 명동의 '윤하영 부티크' 로 보내 달라고 했다.

그리고 축하카드에는 간단히 '그대의 서른 세번째 생일을 축하합니다' 라고만 적어 달라고 했다.

근사하거나 감동적인 문구, 아니면 여자의 마음에 깊이 아로새겨질 만한 수사를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화려하고 과장된 것보다 단순하고 담백한 표현이 훨씬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것 같아서였다.

침묵의 방. 꽃배달 부탁을 하고 나서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서랍에서 열쇠 꾸러미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나서 내가 의도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것이 오피스텔의 열린 공간에 할애된 단 하나의 방이었지만, 이사를 와서 짐 정리를 끝낸 뒤부터 나는 그곳을 일절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접근 엄금의 공간으로 내 자신을 스스로 격리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곳은 소설과 연관된 모든 것들, 다시 말해 소설가로 살아온 나의 과거가 고스란히 저장된 방이었다.

거기에는 병풍처럼 벽면을 덮은 책장, 여러가지 자료 파일, 낡고 오래된 386 컴퓨터, 그리고 집필을 위해 내가 사용한 수십권의 노트가 쌓여 있었다.

뿐만 아니라 소설가로 살아오며 얻게 된 자잘한 소품과 기념품, 사진과 패널 따위들이 과거의 특정했던 시간을 반영하듯 이곳저곳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현실로부터 격리된 과거의 분묘에는 오전인데도 푸른 어둠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같은 오피스텔에 속하면서도 그 내부의 공기는 무게가 느껴질 정도로 눅눅하게 가라앉아 있었고, 벽면의 책장에 꽂힌 수다한 서책에서 밀려 나온 특유의 냄새는 곰팡내 못지 않을 정도로 진하게 곰삭아 있었다.

창이 있었지만 의도적으로 거기에다 책장을 놓아 빛을 차단시켜 버렸으니 15층이라 해도 지하 분묘를 무색하게 할 정도였다.

석연찮은 심정으로 나는 잠시 출입문을 등지고 서 있었다.

잊고 지내던 내면의 물결, 기억을 자극하는 향취, 정서를 뒤흔드는 친화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불화감이 이내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망설이지 않고 나는 컴퓨터가 놓인 테이블 옆의 책장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거기, 자료 파일들이 꽂힌 책장의 하단에서 필요한 파일 하나를 찾아냈다.

음식문화 전반에 관계된 자료 파일에서 나는 필요한 레스토랑의 전화번호를 찾아 메모지에 옮겨 적었다.

작년 봄, 일산에 사는 후배 작가와 한번 가 본 적이 있는 바비큐 스테이크 전문 레스토랑이었다.

장흥 기산저수지 옆에 위치한 곳이었는데, 시원스럽게 열린 전망과 울창한 주변의 숲이 인상적으로 내다보이는 곳이었다.

그래서 언젠가 특별한 기회가 생기면 한번 오리라 마음 먹고 레스토랑을 소개하는 안내 팸플릿을 얻어다 자료 파일에다 넣어 두었던 것이다.

박상우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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