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의 컬처코드] # 10 - 팬클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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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카시오페아’ ‘VIP’ ‘원더풀’은 각각 동방신기, 빅뱅, 원더걸스의 공식 팬클럽이다. 수십만 회원을 자랑한다. 이들은 최근 각각 ‘사이버 대전’을 치렀다. 1, 2월 열리는 콘서트를 위한 인터넷 예매전쟁이다. 동방신기 공연은 3만6000장을 세 차례 인터넷 판매했는데 각각 평균 5분에 매진됐다. ‘하늘의 별따기’라는 게 과장이 아니다. 속도 빠른 PC방을 찾거나 일가친척을 총동원하는 사람도 있다.

클래식에서도 유사한 일이 생겼다. 러시아 피아니스트 예브게니 키신의 내한공연이다. 대중 공연과 비교하면 소규모지만 한 구매 사이트가 다운되는 소동이 벌어졌다. 키신의 인터넷 팬클럽은 예매 취소표 확보를 위한 ‘전략회의’를 열었다. 인터넷 시대 신풍속도인 팬들의 예매전쟁이다. 물론 본질은 스타를 향한(보다 정확히는 스타를 실물로 보려는) 팬들의 뜨거운 갈망이다.

#지난 연말 골든 디스크 시상식. 아이돌 그룹이 무대에 오르자 팬클럽은 색깔 풍선과 막대를 흔들며 연호했다. 이들의 무대는 단순한 공연을 뛰어넘어 스타와 팬이 어우러지는 일종의 집단의례처럼 보일 정도였다. 팬들은 자신들만의 상징을 내세우고, 서로를 전혀 새로운 이름으로 호명했다(카시오페아는 서로를 ‘캉’이라 부른다. 이들의 상징은 펄 레드다). 팬들 사이에 현실의 나이차 등은 의미 없다. 노래의 공백에 ‘**짱’‘*** 사랑해’ 같은 추임새를 넣는 것도, 일체감을 드러내는 의례 절차다 .

공연을 보던 일군의 팬들은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천운’이 따라주지 않아 공연장에 오지 못한 다른 ‘캉’들에게 시시각각 공연을 생중계하는 것이다. 그 ‘디지털 수다’ 속에 공연에 대한 도취감은 더욱 커지는 듯했다. 어쩌면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공연 못지 않게, 공연의 열기를 다른 캉들과 공유한다는 집단 체험 아닐까. 동방신기에 열광한다는 것은 동방신기 자체에 열광하는 것에 더해 팬들 간의 강렬한 연대감에 매혹된다는 뜻일 수 있다.

#열정적인 팬덤은 이미 현대인에게 새로운 삶의 방식이나 조건이 되고 있다. 아니, 누구의 팬이라는 것 자체가 이 시대의 새로운 정체성이라 할 수 있다. 특정 스타에 열광하는 팬들만이 아니다. ‘해리 포터’ 출간, ‘스타 워즈’ 개봉을 앞두고 관련 의상을 차려입은 채 서점과 극장 앞에서 새벽부터 장사진을 치는 매니어들이 다 포함된다.

팬 혹은 팬클럽의 세계는 현존하는 그 어떤 집단과도 다르다. 종교적 열정에 비견될 정도의 순수하고 맹목적인 열정 공동체다. 내부에 좀 더 ‘고수’, 좀 더 ‘열혈 팬’이 존재하기는 해도, 실제 현실 속 계층·연령·지역·이념 등은 무화된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는 적대적 현실 논리가 사라지고 자발성과 헌신과 우애가 앞서는, 공통된 취향과 애호의 세계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팬클럽이나 팬문화를 팬과 스타의 관계로 한정해 보는 것은 반쪽짜리 이해라 할 수 있다. 팬덤은 스타에 대한 열광과 팬들 간의 연대에 의존해 구축되어진 그 무언가다. 현실의 무한경쟁 논리가 비켜가 타산적 관계에 지친 이들의 탈출구가 돼줄 만한 새로운 공동체, 새로운 인간 관계다.

지난해 ‘광우병 정국’에서 제일 먼저 거리로 달려나간 이들이 아이돌 팬클럽이었다는 점은 이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그 다음 달려나간 이들의 상당수도, 팬클럽은 아니어도 각종 취미를 공유하는 동호회, 인터넷 커뮤니티였다. 취향의 공동체가 가진 막강한 힘이다. 

양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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