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언대>중앙은행 독립성 보장 정부 의지만 남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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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독일의 헌법학자 카를 슈미트는 각국의 헌법을 옷에 비유해 체격에 비해 큰 옷,체격에 맞는 옷,체격보다 작은 옷의 세가지로 나눴다.요즘 전개중인 중앙은행제도및 금융감독체제 개편에 대한 논의에도 이 비유가 딱 들어맞는 듯하다.옷이 작아 오히려 제도의 효율적 운용을 방해하고 있는 나라의 경우 적어도 다음 세 요건을 갖춰야 개혁이 성공한다고 본다.

첫째,중앙은행제도를 개혁하고자 하는 정부의 의지가 확고해야 한다.우리나라의 경우 한국은행법과 은행법이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의 통화신용정책 수행과 은행감독업무를 담당하도록 규정하고 있다.문제는 이 권한을 보는 정부와 중앙은행간의 시각차이가 크다는 점이다.정부로서는 중앙은행이 미덥지 못해 갖가지 연결고리를 두고 있는 반면 중앙은행은 정부의 간여와 후견 없이도 제도만 잘 정비해주면 얼마든지 잘 수행할 수 있다고 한다.서로 내 주장이 옳다고 갖가지 대응논리를 개발하고 있으나 문제의 핵심은 중앙은행을 믿고 밀어주는 정부의 의지다.

둘째,중앙은행이 통화신용정책과 금융감독업무를 담당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지난 수십년간 중앙은행이 법에 규정된 대로 본연의 임무를 다했는지에 대해서는 솔직히 선뜻 긍정하기 어렵다.여러가지 현실적인 변명을 할 수는 있지만 어쨌든 결과는 그렇지 못했다.그러다 보니 중앙은행이 통화신용정책과 금융(은행)감독 업무를 담당할 능력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지 국민들이 의구심을 가질 만도 하다.이 점에 관해서는 중앙은행제도에 관계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자성해야 할 것이다.그러나 지금까지는 중앙은행이 소신껏 일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되지 못했지만 그런 장을 열어주면 얼마든지 잘 해낼 수 있다는 것이 우리 중앙은행맨들의 믿음이다.

셋째,국민들의 지지와 성원이다.2차세계대전 직후의 살인적 초인플레이션을 경험한 독일과 같은 경험을 해보지 못한 우리 국민들로서는 중앙은행이 하는 일이 무엇이며,왜 중앙은행이 독자적으로 임무를 수행하지 않으면 안되는지에 관해 관심이 덜한 것이 사실이다.그러다보니 국민의 눈에는 중앙은행제도와 금융감독체계 개편논의가 재정경제원과 한국은행간의 제 실속차리기 싸움으로 비쳐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국회에서 제대로 심의가 이뤄지도록 감시하는 것이 여론이며,여론은 언론.공청회.토론회등 다양한 형태로 수렴이 가능하다.중앙은행제도와 금융감독체계의 개편이라는 중대한 사안에 대해 여론수렴이 충분치 못할 때 파행을 부르게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세가지 요건 중에서도 정부의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본다.정부가 진실로 중앙은행의 독자성을 인정해줄 의지가 있다면 중앙은행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몸에 맞는 옷을 재단해줘야 하지 않을까. 허만조 은행감독원 신용감독국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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