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마음속의문화유산>18. 거문고 '밑도드리'.삼현영산회상.한용운 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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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요즘 우리 주변에는 갖가지 맛을 지닌 음료가 수없이 많다.그러나 이처럼 다양한 음료를 마시고 살면서 더욱 그리워지는 것은 이 땅이 오염되기 전에 우리 선인들이 대대로 마셔오던 샘물.그 맑기로 유명했던 물이다.어떠한 인공의 맛도 가하지 않은 순수한 이 땅의 물맛이 그리워진다.

음악의 경우도 이와 흡사한 점이 있다.온갖 음악을 듣고 살면서도 더욱 그리워지는 것은 기교를 초월한 담담(淡淡)한 음악.심산유곡(深山幽谷)의 약수와 같은 청징한 음악이다.'악학궤범'(樂學軌範)의 말처럼'허무에서 나와 자연에서 이뤄지는'(發於虛而 成於自然) 음악인 것이다.

청량음료 아닌 샘물의 맛 옛 선비들은 주로 거문고로 풍류를 연주했다.그래서 책과 거문고가 한 쌍을 이룬다는'금서'(琴書)라는 말까지 있다.거문고 풍류에 여러 곡이 있지만 나는'밑도드리'가 가장 좋다.거문고 연주자들은 이 곡을 명곡 중의 명곡으로 꼽지만,국악애호가들은 물론 대부분의 국악인들조차 그 값어치를 별로 알아주지 않는 것같아 안타깝다.이렇다 할 선율이나 리듬이 쉽게 파악되지 않고 거문고 소리들이 무표정하게 나열된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나는 밑도드리는 지루한 음악이라고 생각한다.음악에서는 프레이즈(樂句)가 가장 중요한데'밑도드리'의 선율은 어디서 시작하고 끝나는지 알 수 없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던 어느 저명한 국악학자의 말이 생각난다.

'밑도드리'에서 음악의 재미를 느끼려는 것은 샘물에서 청량음료의 맛을 느끼려는 것만큼이나 실망스러운 일일지 모른다.그러나 샘물이 어떤 음료의 맛도 따를 수 없는 물 자체의 고유한 맛을 담고 있듯'밑도드리'에는 어떤 음악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소리 그 자체의 심원(深遠)한 맛이 있다.

가야금 종류의 악기가 중국.일본.몽골.베트남 등 동아시아의 여러나라에 다 있지만 거문고와 흡사한 악기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악기 개량에 앞장서 온 북한이 가야금은 개량했어도 거문고 개량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끝내 포기하고 말았다.이러한 예를 보아도 거문고가 얼마나 고유하고 독특한 우리 민족의 악기인지 잘 알 수 있다.거문고의 특징은 하나의 소리를 음색.강약.음고(音高)의 모든 면에서 어느 현악기보다 다양하게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밑도드리'는 이러한 거문고 소리의 다양한 변화를 만끽할 수 있도록 일반적인 음악의 기교,즉 선율이나 리듬의 기교를 최소화시킨 곡이다.대나무 술대로 줄이 터져나갈 듯 내려치는 대점(大點),손끝으로 살짝 짚어서 속삭이는 듯한 자출성(自出聲),떨다가 밀어올리고 다시 풀어내리는'미환입'(未還入)의 거문고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오염된 흥이 정화되는 기쁨을 느낀다.

'관악곡의 經典'으로 불려 우리 아악 중 피리.대금.해금 등 삼현육각(三絃六角)으로 이뤄지는 합주곡,즉 관악합주곡으로 가장 유명한 곡은'수제천(壽齊天)'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관악주자들은 악곡의 규모로 보나 예술적 수준으로 보나 관악곡의 압권으로'삼현영산회상'(三絃靈山會上)을 꼽는다.

'수제천'은 15분여 걸리는 소곡(小曲)이지만'삼현영산회상'은 40여분에 이르는 대곡이며 연주기교 또한 난삽해서 이 곡을'관악곡의 경전(經典)'이라고까지 한다.아명으로는'표정만방(表正萬方)'이라고 하는데,88서울올림픽 개막식에서 이 곡의 일부가 연주돼 극찬을 받았던 일이 있다.

'삼현영산회상'은 여덟개의 작은 곡으로 구성되는데 우선 그 첫곡인'상영산'의 시작이 독특하다.박을 한번 치고 장구 독주로'끼덕 궁 끼덕'하고 연주하면,피리가 먼저 선율을 시작하고 대금.소금.해금.아쟁이 그 뒤를 따르면서 본격적인 합주가 시작된다.국악곡에서 유례가 없는 장대한 시작법이다.'상영산'은 일정한 박(拍)의 개념이 없는 자유로운 리듬으로 되어 있고 가락도 유장(悠長)하여 아스라한 공간감(空間感)을 준다.

둘째곡인'중영산'부터 일정한 박이 생기고 속도도 점점 빨라지는데 특히 다섯째곡인'삼현도드리'부터는 흥겨운 춤곡풍으로 궁중 정재(呈才)음악의 백미로 꼽히며 이 후반 부분을 따로 떼어내'함령지곡(咸寧之曲)'이라고 부르기도 한다.마지막 곡'군악'의 후반부에서는 모든 악기가 고음역으로 치솟아 호기찬 행진곡풍의 가락을 연주하는데 이를 권마성(權馬聲)가락이라고 한다.여기서 절정에 달하기 직전 합주를 주도하는 피리가 문득 두 장단을 쉬어 그 여백으로 오히려 긴박감을 고조시키는데 모든 악기가 일제히 정상에 올라 최고음을 길게 뺄 때는 장구와 좌고(座鼓)가 북소리를 연타하여 마치 팡파르같은 환희를 불러 일으킨다.

'삼현영산회상'을 듣노라면 이곡은 인간의 사소한 감정이나 서정,인상이나 분위기,풍경이나 사건 등을 표출한 음악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오히려 유구한 세월을 통해 대하(大河)처럼 굽이쳐 온 우리 민족의 역사 그 자체를 주제로 한 음악인 것 같다.이러한 음악은 한 작곡가의 개인적인 창작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사실'삼현영산회상'은 수많은 악공(樂工)들이 오랫동안 갈고 닦아 점진적으로 이룩한 음악이다.말하자면 민족적인 집체창작인 셈이다.

가락 곳곳에 우리 민족의 애환이 서려있지만 이러한 수많은 파고(波高)들이 모여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큰 강물과 같은 소리의 줄기를 이루어 도도하게 굽이친다.

보통 문화유산이라고 하면 옛부터 전해오는 것을 위주로 생각하지만 현대에 일구어 낸 문화유산도 적지 않은 것 같다.만해(卍海)한용운(韓龍雲)의'님의 침묵''알 수 없어요''찬송'같은 시들은 이땅에 우리 민족이 살고 있는 한 영원한 문화유산으로 남을 것이라 확신한다.

만해는 자신의 시를 독자의 자손에게까지 읽히고 싶은 마음은 없다고 했다.“그때에는 나의 시를 읽는 것이 꽃수풀에 앉아서 마른 국화를 비벼서 코에 대이는 것과 같을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작가의 겸허함과 사랑의 정신 때문에 그의 시를 우리 자손도 두고 두고 읽을 것 같다.

나는'알 수 없어요'를 가곡으로 작곡하면서 수백번도 더 읽었지만 읽을수록 더욱 오묘한 맛이 샘솟는듯 했다.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구름의 터진 틈으로 보이는 하늘,탑 위의 하늘을 스치는 향기,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떨어지는 날을 단장하는 저녁놀….우리 주위의 평범한 현상에서 우주의 섭리와 아름다움을 일깨우는 시구들도 기막히지만,마지막에 급전(急轉)하여'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하고 자신과 민족의 현실로 돌아와서 묻는 시구는 비장감까지 준다.

'찬송'은 내가'보허자(步虛子)'라는 곡에 붙인 노래로 편곡해 국립국악원에서 연주한 적이 있다.나는 이 시를 시라기보다 시의 세계를 넘어선 기도문이라고 부르고 싶다.시 전체가 세 개의 절로 돼 있고 각 절은 3행으로 되어 있다.각 절의 마지막 행의 형식은 음악적인 운율감을 느끼게 한다.

세 절의 마지막 행마다'님이어 사랑이어'라고 부른 다음,각절마다'아침 볕의 첫걸음이여''옛 오동의 숨은 소리여''얼음바다의 봄바람이여'라고 읊는데,님을 이렇게 평범하고 고운 말로,그러나 기발한 착상으로 찬송한 예가 동서고금에 또 있는지 의심스럽다.이 시는 만해가 자신의 말대로'봄과 광명과 평화를 좋아하는' 한민족으로 태어나지 않았던들 쓸 수가 없었을 것이다.그런 뜻에서'찬송'은 우리 민족의 영원한 송가임에 틀림없다.

詩: 알수없어요

- 한용운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뿌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없는 바다를 밟고 옥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황병기<이화여대교수.국악>

<사진설명>

삼현영산회상 '표정만방'이라고도 하는'삼현영산회상'은 서울올림픽 개막식에서 연주돼 세계인의 찬사를 받았던 관악기 위주의 음악.역경을 헤쳐나온 민족사의 물줄기처럼 도도하며 연주시간이 40여분에 이르는 대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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